뿌리시간여행
작성자 대종회
작성일 2020-02-24 (월) 08:36
ㆍ추천: 0  ㆍ조회: 17      
IP: 210.xxx.210
장포공 김행과 사위 동강 김우옹 <5>

1. 義城人 東岡 金宇顒은 누구인가?

우선 <한국대백과 인물사전>에서 간단한 이력을 살펴본다.

김우옹[金宇顒]

1540(중종 35)∼1603(선조 3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또는 직봉포의(直峰布衣). 성주(星州) 출신. 아버지는 삼척부사 희삼(希參)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1558년(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중략> ...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청주의 봉계서원(鳳溪書院),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청천서원(晴川書院), 회령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1661년(현종 2)에 문집이 간행되었으며, 1723년(경종 3)에는 이현일(李玄逸)이 지은 신도비가 세워졌다. 저서로는 ≪동강집 東岡集≫·≪속자치통감강목 續資治通鑑綱目≫ 등이 있으며, 편서로 ≪경연강의 經筵講義≫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위 간단한 이력을 바탕으로 김우옹의 1)가족관계 및 가과(家科), 2)남명문인, 3)당색(黨色) 등 내용을 조금 더 살펴보면,

1) 김우옹은 의성김씨 9세 용비(龍庇)의 후손이고 용초(用超)의 7대손이다. 아버지 칠봉 김희삼(1507-1560)도 문과급제자(1540 中宗 35年 庚子別試 18/19)이고, 칠봉의 아들 4형제 宇弘, 宇宏, 宇容, 宇顒 중에서 장남 우홍(1522-1560)도 문과급제자(1553 明宗 08年 癸丑別試 21/41)이고, 차남 우굉(1524-1590)도 문과급제자(1566 明宗 21年 丙寅別試 3/17)이므로, 의성김씨 집안중 아버지와 아들 4부자가 문과급제한 유일한 집안이라고 하며, 동강은 의성김씨 문정공파의 파시조이고, 후손 중에서 알만한 인물을 들라면 구한말의 독립운동가이며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한 心山 金昌淑(1879-1962)이 동강의 13세손이다.

* 둘째형 우굉(3/17)은 장포공(1566 明宗 21年 丙寅別試 14/17)과 문과동방이며 동방중 또 다른 유명인물은 바로 서애 류성룡(15/17)인데, 동인내부의 파당쟁투에서 남명의 수제자인 동강은 퇴계의 수제자인 서애의 저격수 역할을 했다.

* 그밖에 의성김씨의 대표적 인물이라면 모재 김안국(1478-1543)과 학봉 김성일(1538-1593)이 있다. 남명은 모재를 사사했으며 학봉은 남명과 퇴계를 모두 사사했지만 우선적으로 퇴계문인으로 분류되고, 퇴계의 수제자 딱 한 명을 놓고 안동에서 서애파와 학봉파가 경쟁할때 동강은 같은 문중인 학봉을 지원했고, 한양에서 동인 내부의 아계 이산해와 서애가 갈라설 때 아계 편에서 서애의 저격수 역할을 했던 것이다.

2) 남명 조식(1501-1572)의 문인 중에서 우선적으로 수제자급 3명은 내암 정인홍(1535-1623), 동강, 한강 정구(1543-1620)이며, 남명문인은 그밖에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장포공과의 교유관계를 중심으로 꼽는다면 아계 이산해(1539-1609)와 청강 이제신(1536-1584)을 들 수 있다. 남명은 한양에 머물때 장포공의 스승인 청송 성수침과 종유(從遊)하였으므로 남명의 문인들은 자연스럽게 청송문인 장포공과도 교유하였을 것이고, 특히 청강 이제신은 장포공의 평생지우이며, 이산해는 남명문인중 한양파의 중심인물이며 그의 문인으로 강릉김씨 백천 김선여가 있다.

3) 김우옹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분당할 때 동인[김효원 중심]으로, 또 동인이 북인(北人)과 남인(南人)으로 갈라설 때 북인[이산해 중심]으로, 또 북인이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라설 때 대북[이산해 홍여순 중심]으로, 또 대북이 육북(肉北)[이산해]과 골북(骨北)[홍여순]으로 갈라설 때 육북 편에 섰던 인물이다. 한마디로 이산해와 당색을 같이한 것이다.

김우옹의 형 우굉이 장포공과 문과동방이며, 또 김우옹과 같은 남명문인인 청강 이제신이 장포공의 평생지기이고, 또 이산해가 강릉김씨 출사자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점 등 김우옹과 장포공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많은 징후들이 있지만, 지금까지 김우옹의 장인 김행(金行)은 별다른 이론없이 남명 조식의 사위 상산김씨 김행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조선문과방목>이라는 컴퓨터 종합검색 시스템이 조선문과급제자들을 일괄정리하면서 위 시스템의 제작자들이 동강 김우옹의 처부를 오히려 “金行(江陵)”이라고 정리한 것이다.

▷ 03428 김우옹(金宇顒) (1567 宣祖 卽位 丁卯式年 11/33)

【전자】  진사(進士)
【 자 】  숙부(肅夫)
【생년】  경자(庚子, 1540)
【졸년】  계묘(癸卯, 1603) 향(享) 63
【 부 】  김희참(金希參) (02879)
【 조 】  김치정(金致精)
【 증 】  김종혁(金從革)
【외조】  곽인화(郭仁化) (淸州) ☞ 일작(一作) 곽인화(郭仁和)
【처부】  김행(金行) (江陵) , (03414)
          ☞ 조식(曺植)의 외손(外孫)인 상주인(尙州人) 김행(金行)이란 곳도 있다. 당고(當考).
【직력】  호당(湖堂) 이참(吏) 이판(吏判) 무오진(戊午進)
【본관】  의성(義城)
【거주】  성주(星州)
【 호 】  동강(東岡), 직봉포의(直峯布衣)
【시호】  문정(文貞)
【가과】  우홍(宇弘)(03135) , 우굉(宇宏)(03403) 의 제(弟)
【기타】  유정담(有政談) 남명문인(南冥門人)

풀이하자면, 김우옹의 처부는 우선적으로 강릉김씨 김행으로 보이는데, 다른 곳에서 조식의 외손인 상주인 김행이란 곳도 있으므로 어떤게 맞는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고 비고한 것이다. 물론 비고란에서 조식의 외손(外孫)이라고 한 것도 오류이고, 상주인 김행은 조식의 사위가 맞다.

* 과거 응시자들은 본인의 본관과 부 조부 증조의 이름을 기입하고 또 외조부 및 처부의 이름을 기입해야 하는데, 외조부 및 처부의 경우 본관을 따로 명시하지는 않는다. 즉 김우옹은 외조부 郭仁化 처부 金行이라고만 적은 것인데, 위 시스템의 제작자들이 이것저것 관련 자료를 검토해서 외조 곽인화의 경우 청주곽씨 곽인화이고 또 郭仁化는 다른 곳에서 郭仁和 로 표시된 곳도 있으며, 처부 김행의 경우도 강릉김씨 김행으로 보인다고 정리한 것이다. 즉 김우옹 본인이 직접 처부를 강릉김씨 김행이라고 적었다는 것은 아니다.

위 <조선문과방목> 시스템의 제작자들이 김우옹의 처부 김행을 일차적으로 강릉김씨 김행이라고 정리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사위 김우옹에 비해서 처부 상주인[즉 상산김씨] 김행의 격이 너무 떨어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 그렇다면 商山金氏[또는 尙州金氏] 金行은 누구인가?

우선 남명학연구원 > 남명을 찾아서 > 연원가 탐구 > 추가문인 > 김행 편을 살펴보면,

김행(金行)의 본향(本鄕)은 산청군 신등면 법물리이며, 상산인(商山人)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진사(進士) 휘(暉)이고 증조는 진사(進士) 자철(自澈)이며 고조는 사간원 지평(司諫院持平) 이용(利用)인데, 즉 여말(麗末) 두문동(杜門洞) 은사(隱士)로 객남(客南)하신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 단구재(丹邱齋)의 후손이다. 그는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언필(彦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 <중략> ... 김행은 남명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벼슬은 박학독행(博學篤行)으로 일찍 무장현감(茂長縣監)에 발탁되었던 바 그 후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가 되고 만호(萬戶)를 지냈으며, 또한 고양군수(高陽郡守)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하였다.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창녕(昌寧) 조씨(曺氏)인데 즉 남명선생의 따님이다. 그는 슬하에 두 딸을 두었고 큰 딸은 김우옹에게, 둘째 딸은 곽재우(郭再祐)에게 각각 시집갔다. <하략>

* 위 김행의 약력에서 “벼슬은 박학독행(博學篤行)으로 일찍 무장현감(茂長縣監)에 발탁되었던 바 그 후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가 되고 만호(萬戶)를 지냈으며, 또한 고양군수(高陽郡守)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역임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근거가 박약한 주장이고 황당무계해서 필자는 쉽게 믿기 어렵다.

* 또 “고조부 김이용이 사간원 지평”이라고 했는데, 지평[종5품]은 사헌부의 관직이고 같은 품계의 사간원 관직은 헌납(獻納)이라고 한다. 이런 오류가 위 기사의 신뢰성를 더욱 못믿게 만든다.

* 무장현감의 현감은 종6품 벼슬로 현감은 사마시 합격자나 문과급제자가 아니더라도 재야의 인물중 능력있는 자가 추천을 받아 출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나이가 거의 50대 이상이며 그러나 초임 현감이 마지막 벼슬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더 이상 승진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 승문원 교리는 종5품 벼슬로 일명 문한(文翰)이라는 것인데, 문장에 뛰어나야 하며 한마디로 배운게 많아야 맡을 수 있는 자리다. 만호는 고려 군사제도의 유습으로 수군에서만 명맥이 유지되어 오던 무관직[종4품]이고 본직이 아닌 경우는 거의 대부분 향리에서 아랫사람들이 예우차원에서 “만호나리” 처럼 불러주는 호칭적 작위와 같은 것이다. 군수는 종4품, 목사는 정3품 문반 외관직이다.

* 어떤 음관 출사자의 환로(宦路)가 이렇듯 현감 - 승문원 교리 - 만호 - 군수 - 목사까지 역임하는 경우는 사실상 불가능하며, 실제로 역임했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 검색되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 김행의 선조 중에서 여말선초 두문동 출신 단구재 김후(金後)(1372-1404)가 조선 건국후 산청군 신등면에 입향하면서 그의 상산김씨 후손이 이 일대에 세거하게 되었고, 김행의 고조부인 김이용(金利用)이 [문과] 단종(端宗) 1년(1453)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정과(丁科) 12위로 급제하여 비교적 낮은 관직인 사헌부 지평(持平)[정5품] 벼슬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을뿐 증조부 김자철(金自澈), 조부 김휘(金暉), 당사자 김행(金行) 등은 모두 사마시 합격 기록 조차도 없다.

* 다만 부 김언필(金彦弼)은 [생원진사시] 중종(中宗) 17년(152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58위 진사 3등(三等) 57위 합격기록이 있고, 인적사항에 자 인재(隣哉) 본관 상주(尙州) 거주지 창원(昌原)으로 기재되어 있어, 남명 조식의 본가 합천 및 처가 김해와 가까우므로 사돈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김언필을 홍문관부제학[정3품 당상]이라고 했는데, 사실상 불가능하며, 그렇다면 증직(贈職)이란 얘기인데, 증홍문관부제학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증직이라고 해도 홍문관부제학은 아무한테나 증직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 따라서 고조부 김이용이 사헌부 지평을 끝으로 낙향하여 향반 토호(土豪)로 정착하였거나, 아니면 이 고장 원래의 만호(萬戶)의 딸에게 장가들어 그의 후대가 만호벼슬을 세습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김행의 이력 중에서 인정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튼 세습직위 萬戶 金行 정도뿐이다.  

* 또한 김행의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창녕(昌寧) 조씨(曺氏)인데 즉 남명선생의 따님이다”고 되어 있는데, 숙부인이라면 정3품 당상관의 외명부 품계이다. 즉 김행의 품계가 정3품 당상관이었다는 얘기인데 이것도 쉽게 믿기 어렵다.

그리고 국립진주박물관 > 문화재 > 보물 1020호 “성화16년2월13일…동복화회문기(成化十六年二월十三日…同腹和會文記)” 의 안내문 내용을 살펴보면,

이 문서(文書)는 상산(商山) 김씨(金氏) 16세(世)가 되는 진사(進士) 김광려(金光礪), 유학(幼學) 김광범(金光範) 형제(兄弟)와 여서(女壻) 좌랑(佐郞) 한건(韓健)의 처(妻) 삼남매(三男妹) 가 모여 부모(父母) 전래(傳來)의 미분(未分)된 토지와 노비를 분배(分配)하는 화회문기(和會文記)이다.
상산(商山) 김씨(金氏) 시조(始祖)는 김수(金需)로 려조(麗朝)에서 보윤(甫尹)을 역임한 바 있으며 19세(世) 되는 김행(金行)은 문과출신(文科出身)으로 만호(萬戶)를 거쳐 교리(敎理)등 관직을 역임했는데 배우자인 숙인(淑人) 창령조씨(昌寧曺氏)는 바로 문정공(文貞公) 남명(南冥) 조식(曹植)의 여식(女息)이다. 이들 여서(女壻)로는 남명(南冥)의 제자(弟子)되는 문정공(文貞公) 동강(東岡) 김우옹과 또한 차녀(次女) 여서(女壻)는 임란(壬亂) 때 의병장(義兵將)인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이름높은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가 된다.  

* 명나라 연호 성화(成化) 16년은 조선 성종 11년 1480(경자년)이다.

* 성종 11년 1480년의 이야기 상산김씨 16세 남매들의 동복화해문기(同腹和會文記) [어머니가 같은 동복 남매들의 재산을 분배한다는 것을 문서로 남긴 기록]를 안내설명하면서, 갑자기 아무 상관도 없는 19세 김행 관련내용(1550-1580년경 정도)을 꺼낸 이유는 바로 김행이 그 유명한 조식의 사위이며, 또 김행이 그 유명한 김우옹과 곽재우의 장인임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 위 내용 중에서 “19세(世) 되는 김행(金行)은 문과출신(文科出身)으로 만호(萬戶)를 거쳐 교리(敎理)등 관직을 역임했다”고 되어 있는데, 상산김씨 김행이 문과출신이라는 것은 황당무계한 주장이다.

* 또 김행의 “배우자인 숙인(淑人) 창령조씨(昌寧曺氏)는 바로 문정공(文貞公) 남명(南冥) 조식(曹植)의 여식(女息)이다”고 했는데, 숙인은 정3품 당하관이나 종3품 벼슬아치의 처에게 부여하는 외명부 품계이다.

그리고 인터넷에 소개되어 있는 <상산김씨의 유래> 의 일부를 소개하면,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해서는 김순경 (金舜卿), 김우경(金禹卿)형제가 충북 귀산(鬼山)에서 적을 토벌해 공을 세웠고, 합천(陜川) 의병대장이던 김준민 (金俊民)은 성주(星州), 안언(安彦) 전투에서 적 500여명을 죽이고, 진주대첩(晉州大捷)대는 김시민(金時敏) 장군을 도와 외곽에서 적을 공격해 패주시켰으나 끝내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되면서 순절했다. 그 후 조정에서는 김준민(金俊民)에게 병/형조(兵/刑曺)판서의 관직을 내리고 진주 창열사(晉州 彰烈祠)에 봉안케 했다.

만호(萬戶) 김행 (金行)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사위다.

황윤길(黃允吉), 김성일(金誠一) 등과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서장관(書狀官) 김명0(金命0)은 임란때 충주목사로서 성을 끝까지 지켰다. 또 김헌 (金憲)은 안령(鞍嶺)전투에서, 김홍면 ((金弘勉)과 김지룡(金志龍)은 곽재우와 함께 활약해 선무1등(宣武1等) 또는 2등원종공신(2等原從攻臣)이 됐다.

http://www.sangsan.com/sangsankim1.htm

* 임진왜란 당시 상산김씨 여러 의병장들의 업적을 소개하고 있는데, 만호 김행의 유일한 업적(?)은 바로 남명 조식의 사위라는 것이다.

* 황윤길(黃允吉), 김성일(金誠一) 등과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서장관(書狀官) 김명0(金命0)은 임란때 충주목사로서 성을 끝까지 지켰다 - 고 되어 있는데, 김명0(金命0)의 이름 끝자가 누락되어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때의 서장관은 허균의 배다른 형 허성(許筬)이고 상산김씨 김명0(金命0)이 아니다.

이상 종합해 보면 김우옹의 처부는 상산김씨 김행이고, 상산김씨 김행의 이력이 다소 과장된 측면도 없지 않으나 김우옹의 처부인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인다. 이것은 또한 남명 조식의 이력에서 김우옹과 곽재우를 외손서(外孫壻)라고 표현한 점, 김우옹과 곽재우가 동서지간이라고 강조한 점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다만 <조선문과방목> 검색 시스템이 김우옹의 처부를 金行(江陵)으로 일차 정리한 것은 무엇보다도 사위 김우옹의 장인으로서 상산김씨 만호 김행의 격이 조금 떨어지고 또 문과급제자 김행이란 잘못된 기록에 경도되었기 때문에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현단계에서 강릉김씨 장포공 김행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도 아니지만, 한편으로 동강 김우옹 같은 유명인 사위가 강릉김씨 족보에서 누락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장포공(1532년생)과 김우옹(1540년생)의 연배차이가 옹서지간을 맺기에는 너무 작다는 점에서 필자의 견해는 일단 장포공은 동강 김우옹의 처부가 아닐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싶다.

< 계속> 이어서 장포공 관련 <필자후기-끝>를 연재할 예정입니다.

숙간공 백동파 도정공지파 38세 형기
  0
3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