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시간여행
작성자 대종회
작성일 2020-02-24 (월)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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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포공 김행과 사위 동강 김우옹 <3>

장포공과 파평윤씨 원룡의 딸 사이에 효엄, 충엄, 우엄 등 3명의 아들과 두 딸을 두셨는데 사위들은 윤지와 이호영이다.

행   (行)   25 子   국평 (國枰) 사희 (士熙) 상 (湘) 한림공 장포공 파주파

효엄 (孝淹) 26 子 행 (行) 국평 (國枰) 사희 (士熙) 한림공 장포공 파주파      
충엄 (忠淹) 26 子 행 (行) 국평 (國枰) 사희 (士熙) 한림공 장포공 파주파      
우엄 (友淹) 26 子 행 (行) 국평 (國枰) 사희 (士熙) 한림공 장포공 공주파  

윤지 (尹贄) 26 사위 행 (行) 국평 (國枰) 사희 (士熙) 한림공 장포공 파주파      
이호영 (李昊英) 26 사위 행 (行) 국평 (國枰) 사희 (士熙) 한림공 장포공 파주파  

우선 강릉김씨 홈페이지 인터넷 족보 <내용보기>에서 이들의 이력을 살펴보기로 한다.

子 孝淹(효엄)◁
參奉◁
[配]晋州柳氏 父 監察 承福◁

효엄은 참봉 벼슬을 했고,
[배]는 진주유씨이며 부는 감찰 승복다.

효엄은 참봉[종9품] 출사초기에 후손도 없이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장인 유승복은 감찰[사헌부 정6품] 벼슬을 했다고 하는데 검색되지 않는다. 사헌부 감찰은 문부백관의 비리를 규찰하는 자리로서 요즘으로 치면 검찰청 검사에 해당한다. 출신(出身)[문과급제자의 다른 표현] 중 강직한 인품을 가진 관료가 거쳐가는 핵심요직이다.  

子 忠淹(충엄)◁
字 老范 號 一愚
一五八一年 宣祖 辛巳 生
光海 癸丑 增廣 進士 連山縣監 通訓大夫
一六四九年 仁祖 己丑 七月十五日 卒 贈執義
[墓]先塋 亥坐◁
[配]平山申氏 父 儁 祖 副摠管 翌 曾祖 贈參判 龜峰 命仁 外祖 吳認
[墓]부◁

아들 충엄
자는 노범이고 호는 일우이다.
1581년 선조 신사년 생이고,
광해 계축 증광시에 진사합격하고, 연산현감을 거쳐 통훈대부에 올랐다.
1649년 인조 을축 7월15일 졸했으며, 사후 집의가 추증되었다.
[묘]는 선영 해좌이다.
[배]는 평산신씨이고, 부는 준, 조는 부총관 익, 증조는 증참판 귀봉 명인이고, 외조는 오인이다.

* 무엇보다도 둘째 아들 충엄은 아버지 장포공과 무려 49세의 나이차가 나는데, 그렇다면 족보의 기록대로 파평윤씨가 전처이고 생모라면 대략 50세에 충엄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충엄은 33세되던 광해군(光海君) 5년(1613) 계축(癸丑)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44위로 합격할 때, 부모구존 자시하(慈侍下) 기록하였다.

자시하(慈侍下)는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만 생존해 계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진사 합격당시 생모 파평윤씨가 아직 생존해 계셨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때 파평윤씨의 나이는 대략 85세 정도가 되며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시점에서 장포공의 두 부인을 다시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配]全州李氏 父 順平令 壽
[配]坡平尹氏 父 參奉 元龍 祖 主簿 興孝 曾祖 參判 希仁 外祖 府使 李滌 有三男二女◁

파평윤씨가 3남2녀를 두었다는 족보의 기록은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면 전처 전주이씨가 어느 시기에 후손없이 사망하였고, 파평윤씨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후처로 들어와 3남2녀를 낳았다는 것이며, 2남 충엄이 1581년생이고 3남 우엄이 1584년생이므로, 이때 아버지 장포공은 52세였다. 그리고 생모 파평윤씨는 아무리 늦어도 40세가 넘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대략 1545년생 정도이며, 장포공이 상처하고 대략 2~3년 지나서 25세되던 1570년경 후취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2녀는 모두 누나들일 가능성이 크다.

당시 양반규수들은 보통 18세 정도에 결혼하는데, 후손도 없이 남편이 일찍 사망하면 다시 친정으로 돌아와서 몇 년 뒤에 재가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파평윤씨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충엄의 묘는 아버지 김행묘[파주시 문산읍 내포리 산 24-10] 아래 있으며 묘비<세로쓰기>는 다음과 같다.

淑人 平山 申氏
江陵 金公 忠淹      之墓
通訓大夫連山縣監

* 위 묘비는 어떤 능원묘 답사팀이 장포공 김행의 묘를 답사하면서 바로 아래 있는 위 비석을 사진으로 인터넷에 올린 것을 필자가 보고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그 답사팀은 “누구의 묘인지 모르겠다”고 부연설명했다. 아니 강릉김씨 김행의 묘를 답사하면서, 바로 아래에 있는 강릉김씨 충엄의 비석을 보고 “누구의 묘인지 모르겠다”고 하면 말이 되는가. 당연히 아들이지 누구 이겠는가.

연산현감은 종6품 관직으로, 품계는 선교랑(宣敎郞)[상계]이나 선무랑(宣務郞)이다. 충엄은 사후에 집의(執義) [사헌부 종3품]가 추증되고, 통훈대부[정3품 당하]의 품계가 가자(加資)되었다. 품계가 높고 관직이 낮을 때 행(行)을 써서, 通訓大夫 行 連山縣監, 이라고 해야 정확한 것이다. 따라서 위 비석은 최근에 후손이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밖에도 부좌(祔左) 표기를 하지 않고, 지방식 표기[왼쪽이 남자, 오른쪽이 여자]를 한 것을 보아서도 위 비석은 최근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김충엄은 조선왕조실록에 딱 1건 검색되는데 다음과 같다.

인조 37권, 16년(1638 무인 / 명 숭정(崇禎) 11년) 10월 10일(기해) 3번째기사

충청도 암행 어사 정치화(鄭致和)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청주 목사(淸州牧使) 홍입(洪雴)과 연산 현감(連山縣監) 김충엄(金忠淹)과 온양 군수(溫陽郡守) 장우한(張遇漢)을 파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충엄은 33세 되던 1613년(광해5)에 진사합격하고 어느 시점에 출사[종9품]하여 57세 되던 1638년(인조16)에 연산현감[종6품]으로 재직중 파면되었다는 것인데, 이때가 병자호란(1636~37) 끝나고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비출신 관리들의 눈물겨운 관로(管路)를 보는 것 같아 애처롭다. 19세에 문과급제한 엘리트 암행어사 정치화에게 50대의 비출신 사또들이 한방에 파면된 것이다.

정치화(鄭致和) 1609년(광해군 1)∼1677년(숙종 3). 본관은 동래(東萊)    당시 29세
[문과] 인조(仁祖) 6년(1628) 무진(戊辰) 별시(別試) 을과(乙科) 4위 /    합격연령 19세

홍립(洪雴) 1577년(선조 10)∼미상. 본관은 풍산(豊山)            당시 51세[정3품]
[문과] 인조(仁祖) 5년(162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3위    합격연령 50세

김충엄(김충엄) 1581년(선조 14) ~ 1647(인조25). 본관은 강릉(江陵)    당시 57세[종6품]
[생진] 광해군(光海君) 5년(1613) 계축(癸丑)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44위

장우한(張遇漢) 1585년(선조 18) ~ 미상. 본관은 인동(仁同)            당시 54세[종4품]
[생진] 선조(宣祖) 38년(1605)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49위

장인 신준은 검색되지 않지만 처조부 신익과 처증조부 신명인은 인물사전에서 확인되고, 처외조부 오인은 검색되지 않는다.

신익(申翌)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평산(平山). 명인(命仁)의 아들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으로 기용되었다가 1556년(명종 11)에 직권남용으로 파직되었다.
1559년 함평현감으로 재임용되었는데, 이때 왜구의 배를 나포한 공으로 6품직에서 4품직으로 특진되었다.
1571년(선조 4)에는 함경남도병마절도사, 1573년에는 함경북도병마절도사, 1574년에는 제주목사, 1575년에는 전라도병마절도사, 1583년에는 순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충청병사로서 3도의 근왕병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던 중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해보고 대군이 흩어지자 나중에 패전의 허물을 쓰고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완력뿐만 아니라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순천부사로 있을 때에는 기묘사화 때 희생된 8현(賢)을 추모하여 《팔현전(八賢傳)》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신명인(申命仁) 1492년(성종 23)∼미상.

조선 중기의 문인.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영중(榮仲), 호는 구봉(龜峰)·송정(松亭)·풍류광객(風流狂客). 숭겸(崇謙)의 후손이며, 김식(金湜)의 문인이다.
1519년(중종 14)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이약수(李若水)·박광우(朴光祐) 등과 함께 성균관유생 등 1,000여명을 이끌고 광화문에 집결하여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파의 구명을 위하여 상소하였고, 대궐에 돌입하였다.
그 다음해에 거창으로 피신하여 갔던 그의 스승 김식이 자결하자 그 시신을 충주로 모셔와 장사지냈고, 그를 애도하는 〈조송옥사 弔宋玉辭〉를 지었다. 이후 사환(仕宦)을 단념하여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나, 이로 인한 무고를 두려워하여 과장(科場)에는 들어갔으나 술만 마시고 나왔다고 한다. 항상 윤수(尹壽)·목세칭(目世秤) 등과 함께 시문을 읊으며 세월을 보냈고, 만년에는 최수성(崔壽城) 등과 함께 풍속교정에 힘썼으며, 문장에도 탁월하였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정광필(鄭光弼)·안당(安塘)·이장곤(李長坤)·김정(金淨)·조광조·김식·기준(奇遵) 등과 함께 8현(八賢)이라 불렀다고 한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청(貞淸)이다.

< 계속> 다음은 3남 우엄에 관해서 살펴봅니다.

숙간공 백동파 도정공지파 38세 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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