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시간여행
작성자 대종회
작성일 2020-02-24 (월)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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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 이언적의 경우 <2부-2>

위 약력에서 조윤손의 생몰년이 미상으로 되어 있지만 1502년(연산8)에 무과급제했다는 사실에서, 대략 30세 전후해서 급제했다고 가정한다면 대략 1470년생 정도될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데, 실제로 창녕조씨 시랑공파(侍郞公派)[고려조 정4품, 조선조 6조의 정5품 정랑에 해당]의 인물소개와 조윤손이 사망하고 친구 어득강(魚得江)[1470(성종1)-1550(명종5)]이 찬한 묘갈에 보면 조윤손의 생몰연대는 1468(세종14/예종즉위9월)-1547(명종2)이다. 조윤손은 1547년(명종2) 1. 27.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는 명종실록기사가 있고, 그후 어느 시점에 사망했다는 것인데, 무려 80세까지 장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언적은 1547년(명종2) 9. 19. 강계로 유배되었는데, 조윤손의 사망시점이 그 전인지 아니면 후인지 정확하게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이전인이 양부의 시묘살이를 하다 - 49제까지 마치고 - 생모와 함께 아버지의 본가 경주를 찾아갔을 때는 생부 이언적이 이미 강계 유배중이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창녕조씨 시랑공파는 집안 대대로 창녕에 세거했는데, 아버지 조숙기(曺淑沂:1434-1509)가 진주출신의 진양정씨 정유의(鄭攸宜)의 딸에게 장가들어 진주로 이거했고, 조윤손은 진주에서 출생했다. 조숙기가 강릉대호부사 재임시 형 연손(年孫)이 또 1개월뒤 어머니 진양정씨가 사망했을 때 윤손이 시신을 거두어 진주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한마디로 효자라는 이야기다. 아버지는 나중에 안신(安信)의 딸을 재취하여 1남1녀를 두었다고 하는데, 아들 이름이 윤남(潤男)이라고 한다.

즉 전처 정씨 소생의 두 아들은 年孫과 潤孫으로 孫字 돌림인데, 후처 안씨 소생의 아들은 孫字 돌림이 아니라 살아있는 배다른 형 潤孫의 이름에 맞추어 潤字 돌림으로 潤男이라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윤손에게 아들은 없고 딸만 3명이 있었는데, 사위가 하결(河潔), 류홍(柳泓), 정항(鄭沆) 이라고 한다. 이중 한국대백과사전에서 확인되는 류홍의 생몰연대는 1483(성종14)-1551(명종6) 이다. 따라서 조윤손이 이전인을 데려다 후사로 삼을 수 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상황이 짐작되는 대목이기도 한데, 다른 한편으로 시랑공파 세계도에 보면, 甲生 - 勍 - 3남 顔仲 - 4남 淑沂 - 潤孫 - 義碩 - 禎 - 德裕 - 로 기재되어 있고, 숙기의 후사에 조졸한 형 年孫과 배다른 동생 潤男의 이름은 아예 빠져있고 오로지 윤손만 있으며, 윤손의 아들이 義碩인데 아마도 양자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전인이 양부 조윤손의 보호아래 명문자제 이상으로 고도의 품격과 학식을 갖추었다는 사실이고, 이러한 사실이 2세대 이전인과 3세대 이준에 이르기까지 전체 줄거리 전개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이전인은 천하의 효자이며 강계에서 귀향한뒤 퇴계 이황과 토론을 할 정도로 높은 학식을 갖춤으로써 역사에 약력을 남겼다.

다른 한편으로 3세대의 이야기지만 1583년(선조16)에 여진족 추장 미탕게가 변방을 침범하여 5개월 동안 전쟁이 지속되었는데, 이때 병조판서로 있던 율곡 이이가 군량미나 군마를 받는 조건으로 서자들에게도 과거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자 - 일명 허통(許通) - 고 제안했고, 당시에는 반발이 심했으나 아무튼 10년 뒤에 호조의 건의로 납속규정이 정해지게 된다. 이때 이전인의 아들 이준은 쌀 80석을 제공하고 본인은 물론 후손들에게까지 과거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었다. 그래서 이준도 역사에 약력을 남기게 되었다.

이전인(李全仁) 1516년(중종 11)∼1568년(선조 1).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경부(敬夫), 호는 잠계(潛溪).
부친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다. 천성이 온아(溫雅)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몸가짐은 경근(敬謹)하게 하였고, 학문(學問) 또한 깊었다. 1547년에 회재 선생이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의 여파인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 사건으로 강계로 유배되자, 이전인은 직접 유배지로 내려가 정성을 다하여 부친을 봉양하였다. 회재 선생이 폄적 당한 지 7년 만에 죽자, 예를 다하여 거상(居喪)을 하였다. 1566년에 회재 선생이 생전에 써놓은 〈진수팔조(進修八條: 임금 학문에 필요한 여덟 가지 조목)〉의 상소를 올렸다.

이준(李浚) 1540년(중종 35)∼1623년(인조 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求庵).
증조부는 이번(李蕃)이고, 조부는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며, 부친은 예빈시정(禮賓寺正)으로 추증된 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이다.
여러 명현(明賢)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효성(孝誠)이 지극했다. 조부인 회재의 문집 서문을 받아 출간하고, 옥산서원(玉山書院)을 건립했다. 향의를 겸하여 많은 토지를 헌납하고 영구히 봉수(奉守)의 도(道)를 닦았다.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때 영변에 미곡(米穀)을 헌납하여 군사들의 식량을 도왔다. 또 화왕산(火旺山) 회맹(會盟)에 동참하여 수어(守禦)에 대비하였고, 권유로 무과에 합격했다.
관직은 경산현령(慶山顯令)을 거쳐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만경현령(萬頃顯令)·청도군수(淸道郡守)가 되었고 품계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재임 때는 가는 곳마다 청렴(淸廉)·근신(謹愼)하고 백성을 애휼(愛恤)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저서로 《구암유교(求庵遺稿)》 1책 2권이 있다.

이 시점에서 이전인이 상소한 명종실록을 소개하여 조윤손-이전인-이언적의 친자관계를 정사(正史)로써 확인하며,

명종 33권, 21년(1566 병인 / 명 가정(嘉靖) 45년) 9월 4일(신묘) 2번째기사
이전인이 부친 이언적이 찬한 진수 팔규(進修八規)를 올리다

고(故) 찬성(贊成) 이언적(李彦迪)【중종조의 명신인데 인종이 더욱 후대하였다. 효우와 학행이 한때 표준이 되었다. 만년에는 권간(權奸)들의 모함을 입어 강계(江界)로 귀양가 죽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그를 슬퍼하였다.】의 아들 이전인(李全仁)【이언적 첩의 아들이다. 그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이언적에게서 이미 전인을 임신하고는 조윤손(曺閏孫)의 첩이 되었다. 그런 때문에 전인은 오랫동안 조씨로 행세하였다. 조윤손이 죽자, 그 어미는 비로소 이언적의 아들임을 말하였다. 그러자 전인은 조윤손의 재산을 다 팽개치고 이언적을 강계로 찾아가서 드디어 부자의 관계가 되어서 정성껏 봉양하고, 또 조윤손은 양육의 은혜가 있다 하여 심상(心喪)으로 보답했다 한다.】이 이언적이 찬한 진수팔규(進修八規)를 바치고 이어 상소를 올리기를, ...(下略).

또 이 시점에서 양부 조윤손, 둘째사위 류홍, 조옥결과 그 아들[나중의 이준] 및 생부 이언적, 양자 응인(應仁), 장손 의윤(宜潤) 의 생몰연대를 비교해 보기로 한다.

조윤손        1468년(세종14) ~ 1547년(명종2)   조옥결 출생당시 48세
류홍        1483년(성종14) ~ 1551년(명종6)   조옥결 출생당시 33세

조옥결[이전인]    1516년(중종11) ~ 1568년(선조1)   양부 조윤손 사망당시 31세
조oo[이준]                    1540년(중종35) ~ 1623년(인조1)   양조부 조윤손 사망당시 7세

이언적        1491년(성종22) ~ 1553년(명종8)   조옥결 출생당시 25세
이응인        생몰연도 미상
이의윤        1564년(명종19) ~ 1597년(선조30)   조부사망후 11년만에 출생

* 곧바로 <2부-3>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숙간공 백동파 도정공지파 38세 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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