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시간여행
작성자 대종회
작성일 2020-02-24 (월)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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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선여 3부 - 이조 전랑과 분당

이조 전랑(銓郞)

이조의 정랑(正郞)[정5품]과 좌랑(佐郞)[정6품]을 합쳐 전랑(銓郞)이라고 하는데, 정원은 각 3명씩이다. 인사이동이 있어 결원이 생겼을 때 곧바로 충원되는 것이 원칙이나 반드시 지켜진 것은 아니고 후임 추천자에 문제가 생기면 결원된 상태로 두었다.

이조 전랑의 자리가 중요한 것은 이조 직계아문이나 속아문의 당하관[정3품하계]의 관리를 의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후임자를 직접 추천할 수 있기 때문에, 전랑 자리는 요직이라고 불리는데, 이조 전랑은 6조 중에서도 요직 중의 요직이었고 좌랑보다는 정랑이 더욱 중요한 자리였다.

이조 전랑 자리를 두고 선조대 초기에 훈척계 심의겸과 신진사류 김효원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는데, 이것이 동서 분당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이미 명종대에도 소윤의 견제세력이었던 이량이 자신의 아들 이정빈을 이조 전랑에 추천하다가 관료들의 반대로 실패하는 등 이조 전랑을 둘러싸고 추악한 과거가 있었다.

우선 선조 즉위 초기[즉위년 11월] 3정승 및 6조, 3사의 당상관과 당하관 명단은 다음과 같다.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좌의정 이명(李蓂) 우의정 민기(閔箕)
대사헌 박응남(朴應男) 대사간 윤두수(尹斗壽) 대사성 박소립(朴素立)

이 때
이조 판서는 박영준(朴永俊),
참판은 이문형(李文馨),
참의는 강사필(姜士弼),
정랑(正郞)은 이제민(李齊閔)과 이산해(李山海),
좌랑(佐郞)은 이이(李珥)·정유일(鄭惟一)·구봉령(具鳳齡)이고,

호조 판서는 홍담(洪曇),
참판은 윤의중(尹毅中),
참의는 이지신(李之信),
정랑은 이경명(李景明)과 김부인(金富仁),
좌랑은 허진(許晉)·유덕수(柳德粹)·노기(盧祺)이고,

예조 판서는 박충원(朴忠元),
참판은 오상(吳祥),
참의는 임내신(任鼐臣),
정랑은 정언지(鄭彦智)·황정욱(黃廷彧)·윤강원(尹剛元),
좌랑은 이해구(李海龜)·권징(權徵)이고,

병조 판서는 원혼(元混),
참판은 정대년(鄭大年),
참의는 이희검(李希儉),
참지(參知)는 박근원(朴謹元),
정랑은 권극례(權克禮)·황윤길(黃允吉)·김규(金戣),
좌랑은 이정암(李廷馣)·김효원(金孝元)·오건(吳健)·임국로(任國老)이고,

형조 판서는 김개(金鎧),
참판은 남궁침(南宮忱),
정랑은 장범(張範)·황인(黃璘)·황윤중(黃允中)·박난영(朴蘭榮),
좌랑은 홍인지(洪仁祉)·권붕(權鵬)·유균(柳均)·안용(安溶)이고,

공조 판서는 유잠(柳潛),
참판은 김홍윤(金弘允),
참의는 최옹(崔顒),
정랑은 임윤신(任允臣)·이예열(李禮悅)·성자제(成子濟),
좌랑은 이정립(李挺立)·김경헌(金景憲)·정욱(鄭彧)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조금 흐른 뒤 1572년(선조5) 2월 1일, 이조 정랑 오건이 병으로 사임하면서 후임자로 신진사류의 핵심이었던 김효원을 추천하였는데, 오건은 조식의 문하이고 김효원은 잠재적 동인 - 아직 공식적으로 분당되기 전이었지만 - 이었고, 어느덧 조정의 분위기는 자기사람을 심는 것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선조 즉위 초기에 호남의 기대승[이황의 제자로 볼 수 있음]과 영남사림의 스승격인 이황이 어린 주상의 시강관으로 활동하고, 허엽이 이황을 주상의 스승으로 추천하는 등 조정의 분위기는 영남사류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허엽은 나중에 동인의 영수로 추대되는데, 김효원의 장남 김극권의 처가 허봉의 딸이고, 또 김효원의 맏사위가 허균이다. 아시다시피 허엽의 장남 허성을 제외하고, 차남 허봉과 허난설헌, 3남 허균은 강릉김씨 김광철의 외손자들이다. 또 김효원은 세조-성종대 사림파의 종조(宗祖) 점필재 김종직과 같은 문중(門中) 선산김씨이다.

이조 정랑 추천자 김효원을 당시 이조 참의로 있던 심의겸이 반대하고 나섰는데, 명목상의 이유는 김효원이 명종대 외척 윤원형의 식객이었던 기회주의자라는 것이었다. 김효원의 장인이 초계정씨 정승계인데, 정승계는 윤원형의 첩 정난정의 아버지 정윤겸[중종반정공신]의 조카였으므로, 정난정은 천출이지만 형식적으로 정승계의 사촌누이였다. 김효원은 장인의 사촌매부인 윤원형의 집을 들락거린 것이다.

결국 김효원은 이조 정랑에 임명되지 못했고, 1574년(선조7) 2월 심의겸계인 조정기가 임명되었다. 김효원은 아무튼 같은 해 8월 이조 정랑에 임명되어 목적을 이룬다. 그후 김효원이 이조 정랑 자리를 떠날 때,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그 후임으로 공론화되었는데, 이번에는 김효원이 심충겸을 반대하고 동인계열인 이발을 추천하므로써,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이 지지계열 전체로 더욱 확대되어 1575년(을해) 결국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되고 만 것이다. 을해년에 분당되었기에 역사는 이를 을해당론, 을해분당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김효원과 심충겸은 13년의 연배차이가 있지만 사실상 1564년(명종19) 소과 동기이다. 따지고 보면 개인적 감정은 아니고 조정의 관직이 어느새 단체의 이익을 챙기고 상대방을 배척하는 수단으로 굳어졌던 것이다. 관련자들의 급제시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03325 심의겸(沈義謙) 1535-1587 (1562 明宗 17年 壬戌別試 3/25)
▷ 03251 오건(吳健)     1521-1574 (1558 明宗 13年 戊午式年 30/35)
▷ 03388 조정기(趙廷機) 1535-1575 (1564 明宗 19年 甲子別試 4/12)
▷ 03397 김효원(金孝元) 1532-1590 (1565 明宗 20年 乙丑謁聖 1/4)  
▷ 03541 심충겸(沈忠謙) 1545-1594 (1572 宣祖 05年 壬申春塘 1/15)
▷ 03626 이발(李潑)     1544-1589 (1573 宣祖 06年 癸酉謁聖 1/7)

심의겸의 무리를 서인이라고 했고, 김효원의 무리를 동인이라고 했다. 서인은 신분적으로 훈척, 원로, 보수주류, 부자였으며 지역적으로 서울, 경기, 충청 출신이었고 주로 이이와 성혼, 정철의 문인들이 많았다. 반면에 동인은 신진 진보 비주류이며 한편으로 서경덕 조식의 문인들(경상우도)과 다른 한편으로 이황의 문인들(경상좌도)이 합친 집단이었다. 서경덕 조식 집단의 결속력이 가장 느슨했는데, 이산해는 이 집단의 구성원이다.

그런데 서울 경기 충청 출신이면서도 학맥 및 인맥, 기타 사정으로 남인 - 나중에 동인이 곧바로 북인과 남인으로 분리될 때의 남인이며 북인은 인조반정이후 당파로서 역사에서 사라짐 - 에 속하고 또 남인으로 분류되는 집단이 있는데, 이를 기호남인(畿湖南人)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호(湖)는 호서(湖西)이며 충청도만 가리키는 것이고 호남(湖南), 즉 전라도는 배제된 개념이다.

강릉김씨 출사자들은 대부분 기호남인으로 분류되고 특히 김선여는 이산해의 문인인데,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정과 이유가 있었다.  

숙간공 백동파 38세 형기

<다음 편에서 강릉김씨 - 특히 김선여 - 와 기호남인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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