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27. 숙간공 백동파

  

영의정 김상철 영정

공조판서 시혁(始奕)의 자로 영조 9년(1733)사마시를 거처 1736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지평.교리를 지내고 1757년에 충정도 관찰사에 이어 대사간.한성판윤을 지냈으며 이어 이조.형조.병조판서를 역임하고 그뒤 평안도 관찰사를 거처 1766년 우의정.좌의정.영의정에 올랐다. 학덕이 뛰어나 영조의 신임을 받았고 우의정때 우리나라의 문물제도를 부분별로 망라한 문헌의 필요성을 느껴 왕에게 건의하여 찬집청(纂集廳)을 두어 1770년 『동국문헌비고』를 편찬했다 한편 1771년에는 『명사(明史)』에 실린 『강감합찬(綱鑑合纂)』에 조선왕실의 계보가 잘못 올라 있다는 상소가 있자 자       진해서 선계변무사(璿系辨誣使)로 북경에가서 그책의 개인소장을 금하겠다는 청나라의 약속을 받고 돌아와 『신묘증광록(辛卯重光錄)』을 편집 간행하고 정조5년(1781)에 기로소에 들 어간뒤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786년 아들 우진(宇鎭)이 소론 윤선거(尹宣擧)문집을 훼판한 병신처분(丙申處分)의 잘못으로 숙종이 지적하고 소론 조태구(趙泰耉).류봉휘(柳鳳輝)를 옹호한 죄로 제주도에 유배될때 공도 아들을 전보(全保)못했다는 죄목으로 삭탈관작되었다, 죽은뒤 정조의 조처로 복관하고 충익(忠翼)의 시호를 받았다

  

김상중의 교지

상중(尙重) 공조판서

이조판서에 추증돤 시현(始炫)의 차자로 영조 8년(1732)정시(廷試)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자헌대부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공이 70세에 타계하니 왕이 조시와 제문을 내려 예장케 했다.

  

삼강행실도 김선여(金善餘) 기계 유씨(紀溪兪氏)

선여(善餘)의 처 기계유씨(紀溪兪氏)는 남편이 죽자 슬퍼하고 서러워함이 예법에 지나쳤으며 기절하였다가 다시 살아나고 큰 추위에 홀옷을 입어 반듯이 죽기를 기약하여 하루에 좁쌀죽너덧술 밖에 먹지 아니하고 초하루 보름에 산소에 가서 곡하고 조석 상식 올리는 제수는 손수 장만하였다 거상하고도 상복을 벗지 안이하였고 나물과 장을 먹지 아니하였다 비록 저축한 것은 없으나 반듯이 성찬을 차려 하루 세번 전을 올리고곡하고 명절에는 꼭 산소에 음식을 올이고 제사를 지내고 남과 말할때 이를 보이고 웃지 않았다

  

영정 : 병조찬판 김계하(金啓河)

가선 정진(鼎鎭)의 2자. 정조 23년(1799)에 문과대과에 급제하고 옥당부교리 서장관 등을 거처 강개진 병마첨절제사등을 두루거처 승정원좌승지와 의주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개성부류수 병조참판과 함흥부윤겸 병마수군절도사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