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영견대내마의후예

제3장 영견대내마의 후예

1 한림공파

5세 영견(英堅)한림랑 대내마

   시조 명주군왕의 증손 동정(東靖)의 3자로 상찬(上讚)에 뽑혔으며 내마(柰麻)로 태학감조교(太學監助敎)가 되어 교명을 받아 지었다. 헌강 10년(884)대내마로 태학감 조교로 있던 중 시중 민공(敏恭)의 부사(副使)가 되어 사신으로 당나라에 들어가 황소(黃巢)의 난을 평정한 공을 치하하고 돌아왔다. 진성 7년(893)에는 궁예(弓裔)가 북원으로부터 명주를 침공함을 조정에 들어가 알리고 대비책을 건의하였다. 그후 왕건태조가 공의 어짐을 듣고 태사로 봉하려 했으나 불사이군의 지조로 결코 나아가지 않았다.

 

6세 견술(堅述)창부령

  한림랑 영견(英堅)의 장자로 고려태조 2년에 창부경(倉部卿:재무부서장)에 오르고 성종13년 994년에 박술희(朴術希)와 함계 혜종묘(惠宗廟)에 배향되고 시호는 극익(克翼)이나 후손이 전하지 않는다

 

6세 견웅(堅雄) 호부상서

  한림랑 영견(英堅)의 5자로 태학감에서 수학하여 한림랑을 역임하고 태학감상사(太學監上舍)가 되고 고려 태조 19년(936)에 한림직학사(翰林直學士)를 거처 예부상서를 거처 호부상서에 올랐다

 

7세 징우(徵祐) 병부상서. 장작소감

  상서 견웅(堅雄)의 장자로 명경과에 등제하고 출사하여 현종 6년(1015)에 병부상서에 오르고 현종 9년에 걸안군(契丹軍) 10만이 침공함에 따라 왕을 모시고 피하려다 적군에 포로가 되었다 걸안왕이 공에 벼슬을 주는등 회유하려 했으나 끝까지 듣지 않자 3년만에 풀어주어 귀국하여 우간의대부가 되었다가 병부상서에 올랐다

 

8세 양(陽) 병부상서

  병부상서 징우(徵祐)의 장자로 정종 5년(1039)에 지간원사(知諫院事)에서 한림원직학사에 오르고 문종 10년(1056)에 조정사절(朝正使節)의 부사(副使)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고 문종 10년(1056)에 예부상서. 문종 20년(1066) 이부상서에 오르고 문종 22년 (1068)에 풍덕에 2천8백칸의 대사찰인 흥왕사(興王寺)를 준공하고 왕을 대행하여 낙성제를 올리는등 중요한 국사를 맡아 처리하였다. 문종 20년(1075)에 상서도성(上書都省)상서좌우복야(上書左右僕射)와 참지정사 등의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다

 

9세 원걸(元傑) 호부상서 동북면병마절도사   병부상서 양(陽)의 장자로 호부상서에 올랐다

 

10세 작여(綽與) 예부시랑(정4품)

   호부상서 원걸(元傑)의 자로 합문지후(閤門祗侯)로 출사하여 병.호.이부의 원외랑과 낭중을 역임하고 이부시랑을 지냈다

 

11세 우(祐) 호부시랑

  예부시랑 작여(綽與)의 장자로 중서문하성주서(中書門下省注書)(종7품)로 출사하여 인종12년(1137)에 호부시랑에 올랐다

 

12세 창(昌) 국자사업

  호부시랑 우(祐)의 자로 국자감(國子監)에 출사 예종 24년(1170)에 국자감사업(國子監司業)정4품에 올랐다 이때 명종이 즉위하여 문신정치가 시작되어 무신을 유배시키는 현실에서 공은 화를 피하여 사임하였다

 

13세 거인(巨仁) 서승   사업 창(昌)의 자

 

15세 윤방(允方) 랑장

   국자사업 창(昌)의 손자로 고종 18년(1230)에 몽고병이 선천, 돈주를 함락하고 광주, 충주, 청주를 향하여 침공, 나라에선 궁궐을 강화로 옮기고 전국에서 군을 모병하여 공은 용호군(龍虎軍)으로 출전하여 낭장(郞將)에 올랐다.

 

16세 송(松) 호장   랑장(允方)의 자

 

17세 용린(用麟) 호장   송(松)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