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평의공파

2 평의공파

20세 지(지) 도평의산원우곡현령 홍원현감겸 병마단련판관 중추부첨지사(정3품)

  지군사 탄지(坦之)의 3자로 우왕 13년(1387) 비서성 교서랑으로 출사하였다. 공양왕 2년(1390)에 국가최고 의결기관인 도평의산원으로 재임중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따라 개혁세력이 등장하고, 배원숭명(排元崇明)정책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개혁등 사회 전반에 변혁의 바람이 일게되고 기득권층의 협조가 강압적으로 이루어지게되어 공은 문중의 안위가 본인에 있음을 알고 장형 헌(軒)과 차형 예(예)와 의론하여 13대조 내사령 예(乂)때부터 내려온 사성(賜性)왕씨(王氏)를 강릉김씨로 복성하였다 공은 그로부터 지방관인 홍원현감등을 거처 강릉으로 귀향하여 강릉향교 중건을 주도하여 유학진흥에 심혈을 기우리고 아들 5형제 모두 문무대과에 급제하였다. 공은 평의공파조이다

 

21세 자갱(子갱) 문과급제 형조참의 묘소 남양주군 보건면 배양리

  평의공파조인 지(지)의 장자로 태종 14년(1414)에 문과 대과에 급제하였고 세종년4(1422)에는 춘추관 기사관에서 전농주부가 되고 사헌부감찰과 이조좌랑.교리.사간원 헌납과 지제교를 역임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문종 2년(1452)에 판예빈시를 지내고 형조참의를 거쳐 첨지중추원사를 지냈다

 

22세 백형(伯衡) 부사(府使)

  참의 자갱(子갱)의 장자로 음사로 경상도 교하현감으로 출사하었음. 그러나 끊임없는 수학으로 예종 원년(1469) 추장(秋場)문과시에 다시 급제하고 경산현령 청도군수를 역임하였으며 선산부사(善山府使)를 지냈다

 

23세 여(여) 장사랑 종9품 묘소 풍덕군 남면 사동

  부사 백형(伯衡)의 2자로 장사랑(將仕郞)을 지냈고 중종조때는 민란으로 개풍군 풍덕으로 피난하여 후손은 참의공 풍덕파가 되었다.

 

24세 한영(漢榮) 성균관 승훈전적 묘소 사동

  장사랑 여(여)의 3자로 성균관 승훈전적(成均館 承訓典籍)을 지냈다

 

25세 옥(沃) 선교랑(宣敎郞) 공능참봉(恭陵參奉)   전적 한영(漢榮)의 장자,

 

26세 정환(廷環) 증 판결사   참봉 옥(沃)의 차자,

 

27세 임남(任男) 한성부윤,

  부 정환(廷環)의 자로 무과 급제.인조조 첨정사 일등공신부원사(添靖社一等功臣副元師) 한 성부윤(공신록)

 

28세 극교(克敎) 무과   부 임남(任男) 한성부윤,

 

28세 극효(克孝) 무 만호   임남(任男)의 2자,

 

28세 극제(克悌) 무과   임남(任男)의 3자,

 

28세 극신(克信) 무과   임남(任男)의 4자,

 

29세 두운(斗雲) 무과   부 극교(克敎),

 

32세 계정(啓鼎) 도정(都正)   31세 려수(麗秀)의 자,

 

33세 학부(學부) 효자. 통훈대부 사헌부감찰   계봉(啓鳳)의 계자,

 

36세 선경(善卿) 후능참봉(厚陵參奉)   방익(邦익)의 손자 일수(一秀)의 6세손,

 

34세 병설(秉卨) 군부주사 황해도시찰사   31세 달수(達秀)의 3자 학엄(學淹)의 5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