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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공(尙書公) 신리파(申理派) <2부> 6세 견웅, 7세 징우 및 정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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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최고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12-04 15:02 조회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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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공(尙書公) 신리파(申理派) <2부> 6세 견웅, 7세 징우 및 정종궁주

子 堅雄(견웅)◁
敬順王 九年 己未 公以翰林郞 進太學監上舍
十一月 王欲降于麗祖 公極諫不聽遂 逃還溟州
麗祖問 侍中 堅述諸弟 誰最賢 李學士大吉遷 公不獲己而就
景宗 戊辰 移禮部尙書
成宗 壬午 自刑部 復拜戶部尙書
穆宗 甲辰 致仕 卒于鄕第 享年 八十三◁

6세 5남 견웅

경순왕[56대 재위 927~935] 9년 기미년<899, 959>에 공이 한림랑에서 태학감 상사[직급]로 승진했다.
11월에 왕[경순왕]이 고려 태조에 항복하려고 할 때, 공이 극간하며 듣고 따르지 않은채 명주로 도망쳐갔다.
고려 태조가 시중 견술에게 여러 동생들 중에서 누가 최고 현자냐고 물었고, 학사[대제학] 이대길이 자리를 옮기자, 공이 마다하지 않고 [그 학사직을] 맡았다.
경종[5대 재위 975~981] 무진년<968>에 예부상서로 옮겼고,
성종[6대 재위 981~997] 임오년(982)에 형부로부터 시작해서 다시 호부상서를 제수받았고,
목종[7대 재위 997~1009] 갑진년(1004)에 치사하였고, 고향집에서 졸하였는데, 향년 83세였다.

*** 간지년도 오기 정정

1. 간지 기미(己未)는 899년 또는 959년이므로, 위 기미는 을미(乙未)[935]의 오자임을 알 수 있다.
2. 간지 무진(戊辰)은 968년[4대 광종 5]이므로, 위 무진은 무인(戊寅)[978]의 오자임을 알 수 있다.

* 참고자료를 수기(手記)로 옮겨 적다 보면 족보를 비롯한 모든 기록은 유사한 글자에서 종종 오기(誤記)가 발생하는데 전혀 이상할 것도 없다.

위 족보 내용보기에 견웅의 생졸연도가 명시적으로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아무튼 갑진년(1004)에 치사하고 고향집에서 졸하셨는데 향년 83세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83세 원로(元老)로서 근무하다가 치사하고 그 해에 곧바로 졸하신 것인지, 아니면 2~3년 뒤에 졸하신 것인지, 또는 한참 뒤에 졸하신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문맥상 그리고 향년(83세)을 감안한다면 그 해(1004)에 졸하신 것으로 일단 간주하겠다. 그렇다면 922년 생이다. 그런데 문제는 경순왕 9년 을미년(935)에 태학감 상사에 오르신 나이가 겨우 14세이므로 너무 어리다는 점이다. 적어도 20세 - 20세 태학감 상사도 관행상 너무 어리지만 아무튼 - 이상은 되야할 것이라면 915년 생이다. 그렇다면 졸년(1004)에 비추어 향년 90세가 되므로 또 맞지 않는다.

견웅의 족보내용에 간지년도의 오기(誤記)가 있는 등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가장 모호한 것은
1> 을미년(935) 14세 태학감 상사 승진기록,
2> 태조(918~943) 재위 때 학사를 맡은 후 5대 경종 무인년(978) 예부상서로 옮길 때까지 무려 35~40년간의 공백이 있다는 점 ,
3> 穆宗 甲辰 致仕[목종 갑진(1004) 치사] 기록,
4> 졸 향년 83세 기록, 등 이다.

그리고 치사년도가 목종(재위 997~1009)의 재위기간 중 이라고 감안하여 아무리 올려 잡아도 견웅의 졸년은 997년이다.

또 다른 문제는 아버지 영견(八四一年 新羅 文聖 辛酉生 ~ 九二二年 高麗 太祖 壬午卒 : 향년 82세 )과 백형(伯兄) 견술(憲安王 五年 辛巳(861)生 ~ ? )의 생졸년도이다. 일단 간지년도는 정확하다. 견웅의 생년은 논리성을 배제하고 기록만 참조한다면 922년생이고 - 갑진년(1004) 향년 83세 졸 기록에 얽매이면 - 더 이상 올려 잡을 수가 없는데, 그렇다면 아버지 영견이 82세로 돌아가시던 해[922년]에 태어났다는 것이므로 또 이상하다. 적실(嫡室) 생모(生母)가 80세 정도에 출산한다는 것은 의학상 완전히 불가능하므로 적자(嫡子)가 아니란 말인가?

장남 견술은 아버지와 20년 차이므로 생년은 일견 정확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장남 견술과 5남 견웅의 형제간 나이차가 무려 61년 터울이다. 아버지 영견의 생년(841)과 생모의 의학적 생산능력 50세(890년) 그리고 장남과 5남 사이에 누이가 2~3명 있다고 치고 각 남매간에 차이를 3년 터울로 간주한다면 장남과 5남의 터울을 25~30년 정도로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견웅의 생년은 890년 정도로 비정하는게 맞을 듯하고 또 향년 83세 졸을 감안하면 졸년은 970년 정도이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는 견웅의 장남 징우가 2차 거란의 침입(1010년, 현종 1) 때 소윤(少尹)[종4품] 벼슬로 현종의 몽진을 호종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징우의 나이를 40~50세 정도로 감안한다면 징우의 생년은 960~970년 정도가 되며, 그렇다면 또 아버지 견웅이 73세에 아들 징우를 낳았다는 것이므로 또 뭔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필자는 졸 향년 83세를 졸 향년 93세로 정정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수기(手記)에 의한 오기를 감안할 때  팔(八)과 구(九)의 오기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견웅은 912년 생으로 신라 경순왕 9년 을미년(935)에 24세로 태학감 상사에 올랐고, 고려 목종 갑진년(1004)에 93세로 본직이 아닌 어떤 원로 명예직을 치사하고 그 해에 향 93세로 졸하신 것으로 보인다. 또 912년 생은 아버지 영견의 나이 72세에 태어났다는 것이므로 장남 견술과 5남 견웅은 동복형제(同腹兄弟)가 아님을 알 수 있다.  

子 徵祐(징우)◁
高麗 顯宗朝 兵部尙書 致仕
公以少尹當契丹兵入麗京 陪顯宗出避被執
契丹主欲降之
而不屈刦(겁)之以兵 而亦不懼契丹 乃義而釋之 三年乃得還◁

고려 현종조에 병부상서를 치사하였다.
공이 소윤으로 있을 때 거란병이 고려의 수도[개경]을 침입하는 화를 당했는데, 현종을 도와 출궁하여 잡히지 않도록 배종하였고,
거란 추장이 [고려 왕의] 항복을 받고자 하였는데,
[징우가] 굴하지 않고 병력을 동원하여 물리쳤고, 또 거란족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이내 의로써 물리쳐, 3년만에 환궁할 수 있도록 하였다.

위 거란족의 고려 침입 기사는 고려에서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죽이고 현종(顯宗)을 추대하는 정변(政變)이 일어나자 이를 구실로 1010년(현종 1)에 2차 침입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 거란병은 고려의 국경 요새를 우회하여 개경까지 곧장 쳐들어왔기 때문에 고려 조정은 황급히 전라도 나주로 피신하고 개경이 함락되는 화를 당했는데, 거란족은 고려의 항복을 받아내고자 고려 전역에서 분탕질을 하였고, 당시 소윤[종4품]으로 있던 징우가 왕을 배종(陪從)하였고 또 거란병을 물리쳐 현종이 환궁할 수 있도록 일조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징우는 위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현종조에 병부상서까지 승차하였다고 보이는데, 이때의 나이를 대략 50~60세 정도로 보면 징우의 생년은 950~960년 정도가 된다. 아버지 견웅의 생졸년도(912~1004)를 감안하면 대략 견웅이 38~48세 정도에 아들 징우를 낳은 것이다.  

서 靖宗宮主(정종궁주)◁

견웅의 딸이 고려의 10대 왕 정종(靖宗)의 궁주가 되었다는 것인데, 견웅의 족보 가계도를 보면 이상하게도 아들 징우의 딸도 정종궁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견웅(대략 912~1004)과 징우(대략 950~1020), 정종(1018~1046)의 생졸연도를 비교하면 견웅의 딸이 정종의 후궁이 되었을 가능성은 완전히 불가능하고 또 징우의 딸이었을 가능성도 거의 희박하다. 만약 8세 양(陽)[대략 980년생]의 딸[대략 1010년생]이었다면 오히려 일말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정종[ 靖宗 ] 1018(현종 9)∼1046(정종 12).

고려 제10대 왕. 재위 1034∼1046. 이름은 형(亨). 자는 신조(申照). 현종의 둘째아들로 덕종의 아우이며, 어머니는 김은부(金殷傅)의 딸인 원성왕후 김씨(元成王后金氏)이다.
왕비(妃)는 용신왕후 한씨(容信王后韓氏)·용목왕후 이씨(容穆王后李氏)·용의왕후 한씨(容懿王后韓氏)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고려의 왕으로 동명이인(同名異人)의 정종이 2명 있다는 점인데, 앞서 10대 정종(靖宗) 외에도 또 다른 3대 정종(定宗)이 있다. 따라서 견웅의 딸이 혹시 3대 정종의 궁주가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정종의 한자표기에 오기가 생긴 것인데, 다만 <고려사> 등 정사(正史)에서 확인할 수는 없다.

정종[ 定宗 ] 923(태조 6)∼949(정종 4).

고려의 제3대 왕. 재위 945∼949. 이름은 요(堯). 자는 천의(天義). 태조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충주호족 유긍달(劉兢達)의 딸인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이다. 비(妃)는 문공왕후 박씨(文恭王后朴氏)와 문성왕후 박씨(文成王后朴氏)이다.

반면에 영견의 중형(仲兄) 영길의 후손들 중에 3명의 딸이 태조의 후궁이 되었다는 기록이 족보에 보인다.

1女 영길의 女 玉慶大主(옥경대주)◁ [夫]高麗太祖◁
2女 영길 - 2남 선희(善希) - 1예(乂)의 딸    大溟州院夫人(대명주원부인)◁ [夫]高麗太祖◁
3女 영길 - 3남 순식(順式) - 1수원(守元)의 딸      貞穆夫人(정목부인)◁ [夫]高麗太祖◁

옥경대주의 기록은 분명하지 않고, 제2후궁 정목부인 왕씨(貞穆夫人 王氏) [왕경(王景)의 딸] 과 제8후궁 대명주원부인 왕씨(大溟州院夫人 王氏) [왕예(王乂)의 딸] 처럼 분명한 기록이 있다. 왕경은 김수원의 왕씨 득성 후 개명한 이름이고 또 왕예는 김예가 성을 바꾼 이름이다. 따라서 6촌 자매가 동시에 태조 왕건의 후궁이었다는 것이다.

< 다음 호에 계속>

숙간공 백동파 도정공지파 38세 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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