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시간여행
뿌리시간여행

강김03영견(英堅)이 상서공(尙書公) 신리파(申理派)

페이지 정보

작성자 no_profile 최고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12-04 15:01 조회28회 댓글0건

본문

강김 03 영견(英堅) 01 상서공(尙書公) 신리파(申理派)

4세 동정(東靖)의 3남 영견(英堅) 대내마의 대종통(大宗統)을 이어받은 상서공(尙書公) 신리파(申理派)를 강김 여러 파(派)의 제1탄으로 보고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제2탄 상서공 율동파, 제3탄 상서공 횡성파를 계속 연구하여 보고드릴 예정입니다.

영견 대내마의 대종통은 아들 5형제 중에서 막내인 견웅(堅雄)으로부터 26세 윤경(潤鏡)에 이르기까지 적장손(嫡長孫)으로 면면히 이어져 왔으나 불행하게도 그후 절손됨으로써 대종통은 23세 수겸(守謙)의 아우 수익(守益)의 후손으로 승통(承統)되어 24세 귀경(龜鏡), 25세 형박(荊璞), 26세 경윤(景潤), 27세 응일(應一), 28세 시성(始聲)으로 이어져 왔는데 그 후손들이 신리(申理)에 세거하였음으로 신리파로 불리게 되었다.

1. 신리(申理 또는 新里)는 어디인가

행정구역 :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申理面

현행정구역 강릉시 연곡면에 산의 모양이 장군이 철갑을 입고 서있는 형상으로 되어있다 하여 철갑령(鐵甲嶺)[1013m]이라 이름 붙여진 큰 고개가 있는데, 여기서 발원하여 주문진읍을 거쳐 동해로 빠져나가는 하천의 이름이 신리천(申理川)이다. 철갑령 동쪽으로 신리천 주변에 형성된 마을이 신리이며, 이후 거물이, 방꼴, 봉꾸미, 오릿나루, 소돌 마을 등을 합쳐 강릉면 주문진리가 되었다. 그후 1931년 강릉면이 강릉읍으로 승격될 때 강릉읍 신리면이 되었다가, 1937년 신리면이 주문진면으로 개칭되었고, 1940년 주문진면이 주문진읍으로 승격될 때 주문진읍 신리면으로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문진읍은 본래 강릉군 연곡면의 소속이었는데, 신리(新里)의 이름을 따서 신리면이라 하였다.

2. 상서공(尙書公)의 상서(尙書)란 무엇인가

9세 원걸(元傑)이 고려조에 상서를 역임하므로써 후손들이 상서공을 중시조로 분파(分派)하게 되었는데, 고려의 상서(尙書)는 쉽게 이해하면 조선의 판서(判書)에 해당한다. 고려 초기에 당(唐)나라의 삼성(三省)을 모방하여 중서성(中書省), 문하성(門下省), 상서성 등 3성을 설치하였고, 상서성에는 이부상서, 병부상서, 호부상서, 형부상서, 예부상서, 공부상서 등 6부를 두었는데 그 장관을 상서(尙書)라 하고 정3품을 두었다. 그런데 3성의 기능과 역할이 모호하여 곧 중서성과 문화성을 통합하여 중서문하성를 두고 그 수장인 문하시중(門下侍中)이 6부의 기능을 서정(庶政)하게 되었다. 그후 구조 및 기능, 명칭에 있어 수 많은 변화를 거쳤지만 아무튼 그 큰 골격은 조선의 의정부(議政府)와 6조(六曹)의 모태가 되었다.

조선의 권력구조는 국왕직할의 정치조직과 순수 행정조직으로 대별할 수 있는데, 행정조직이 바로 의정부와 6조이다. 반면에 조선의 정치조직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개괄적으로 설명하면 1차적으로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承政院)[승지 본직 6명 정3품 당상]과 한성부의 일반 백성의 범죄를 재판하는 의금부(義禁府)[판의금부사 겸직 약간명 종1품]가 있다.

2차적으로 국왕을 측근에서 호위하는 내금위(內禁衛)[내금위장 겸직 3명 종2품], 궐내에서 근위하거나 국왕이 거둥할 때 기병으로 호위하는 겸사복(兼司僕)[겸사복장 겸직 3명 종2품], 국왕의 평상시 정책자문기관이며 동시에 유사시 국왕을 애워싸 보호할 책임이 있으며 원로들로 구성된 중추부(中樞府)[영사 본직 1명 정1품, 판사 본직 2명 종1품, 지사 본직 6명 정2품, 동지사 본직 7명 종2품, 첨지사 본직 8명 정3품 당상 총 24명], 유사시 궐밖을 방어하는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 겸직 약간명 정2품] 등 무반(武班)이 있고, 문반(文班)으로 그 기능과 역할이 매우 다양하지만 일단 오늘날 대검찰청에 해당하며 특히 관리들의 비행을 감찰하는 사헌부(司憲府)[대사헌 본직 1명 종2품]과 오늘날 감사원에 해당하는 사간원(司諫院)[대사간 본직 1명 정3품 당상]이 있다.

3차적으로 서울시장과 수도방위사령부의 기능과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한성부(漢城府)[판윤 본직 1명 정2품], 별도의 행정적 군사적 목적을 둔 유수부(留守府)이며 동시에 수도권 방위사령부에 해당하는 개성부(開城府)[유수 본직 1명 종2품]가 있다. 그후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전란을 겪으면서 강화부와 광주부가 추가 설치되었고, 정조 때 수원이 유수부로 승격되어 4유수부제가 정립되었다.  

4차적으로 8도의 감영(監營)[관찰사 문반 본직 1명 종2품]과 8도의 병영(兵營) 및 수영(水營)[관찰사 겸직]이 있는데 모두 국왕직할이다. 이러한 관직 중에서 판의금부사, 내금위장, 겸사복장, 오위도총부 도총관, 한성판윤, 개성유수 등은 국왕의 종친, 장인이나 처남, 유사시 죽기를 각오하고 국왕을 호위했던 신하 등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최측근 친인척이 담당하는게 보통이다.

3. 영견 대내마의 대종통(大宗統) 세계(世系)

05세 영견(英堅)

06세 견웅(堅雄)
07세 징우(徵祐)  
08세 양(陽)  
09세 1원걸(元傑)<상서공>    2상기(上琦)<상서공>
10세 작여(綽與)  

11세 우(祐)    
12세 창(昌)      
13세 거인(巨仁)      
14세 원보(元甫)
15세 윤방(允方)              

16세 송(松)    
17세 용린(用麟)    
18세 1진을(珍乙)          2호(琥) <횡성파>
19세 성덕(成德)  
20세 정(精)    

21세 1자형(自亨)        2자달(自達) <율동파>
22세 여강(汝康)
23세 1수겸(守謙)        2수익(守益)
24세 귀감(龜鑑)          귀경(龜鏡)
25세 승조(承祖)          형박(荊璞)

26세 윤경(潤鏡)         경윤(景潤)
27세 <絶孫>             응일(應一)
28세                        시성(始聲) <신리파>
29세                        1생려(生麗)      

4. 영견 이하 대종세계(大宗世系) 족보 내용보기 설명

5세 子 英堅(영견)◁
八四一年 新羅 文聖 辛酉生
幼而好學博覽經史 擢於上讀
公以奈麻爲太學監助敎 奬勵士流尋 遷翰林郞 掌制敎命
憲康王 十年 己巳 爲侍中敏恭副使 入唐賀破黃巢
眞聖王 七年 甲寅 弓裔 自北原入阿瑟羅州 公避入京都 再陳攻守方略主 以爲奇而不用遂 還溟州遜于山寺
景明王 六年 壬午 將軍 金順式 領兵歸麗朝 溟州遂屬高麗 麗祖知公之賢 使人請見
公辭曰 吾以新羅舊臣 不獨義 不事二姓 實無以奉職
不就而卒于是歲 九二二年 高麗 太祖 壬午卒◁

5세 영견 대내마

841년 신라 문성왕[46대 재위 839~857] 신유년 생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경사(經史)에 박학다식했다. 상독(上讀)[신라의 직책]에 발탁되었다.
공은 내마로서 태학감 조교가 되었으며, 선비들을 장려하고 등용했으며, 한림랑[한림대의 수장, 조선 홍문관 대제학과 비슷할 듯]으로 옮겨, 교명[교육관련 왕명]을 제정하였다.
헌강왕[49대 재위 875~886] 10년 기사년에 시중[수상, 조선 영의정에 해당] 민공[재임 880년(헌강왕 6) 2월 ~ 886. 8월] 의 부사(副使)로 입당(入唐)하여 황소의 난(875~884) 피해[복구]를 하례하였다.
진성왕[51대 재위 887~897] 7년 갑인년에 궁예가 북원으로부터 하슬라주[강릉]에 쳐들어왔을 때, 공이 경도[경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진영을 갖춰 공수방략을 주도하였으나, 전황이 여의치 않고 적을 추적하는 게 어렵게 되자 명주로 돌아와 산사로 피신하였다.  
경명왕[54대 재위 917~924] 6년 임오년에 장군 김순식[왕순식]이 병졸을 이끌고 고려 조정에 귀속하여 명주가 고려에 귀속되었을 때, 고려 태조는 공이 현자임을 알고 사람을 보내 알현을 청했을 때,
공이 사양하며 가라사대, 나는 신라의 구신이므로 홀로 의를 저바릴 수 없고, 두 왕조를 섬길 수 없고, 직책을 맡는게 실익이 없소이다, 말씀하셨다.
출사하지 않고 이 해에 졸하였는데, 922년 고려 태조[재위 918~943] 임오년에 졸하셨다.  

< 참고사항>

* 신라의 마지막 56대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하여 신라가 공식적으로 멸망한 해는 935년(태조 18)이다.

왕순식[ 王順式 ] 차남 영길 대내마의 3남, 견웅의 4寸

생몰년 미상. 신라 말 고려 초의 호족 출신 장군. 본성은 김씨(金氏)라고도 알려졌지만 분명하지는 않고, 왕은 사성(賜姓)이다. 명주(溟州 : 지금의 강릉)사람으로 신라말에 스스로 명주장군이라 칭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궁예와 대치하면서 오랫동안 굴복하지 않았다.

고려건국 후에도 복종하지 않으므로, 왕건은 고심하다가 시랑 권열(權說)의 진언에 따라 당시 중으로 내원(內院)에 머물러 있던, 왕순식의 아버지인 허월(許越)을 움직여 고려로 귀부하도록 권유하게 하였다.

이에 922년(태조 5) 고려에 귀순할 것을 작정하고 먼저 맏아들 수원(守元)을 보내어 귀순의 뜻을 전하였다. 왕건은 수원을 맞이해서 왕씨성을 사(賜)하고 전택을 후하게 내려주었다.

뒤에 또 아들 장명(長命)을 보내어 군사 600인으로 숙위하게 하고, 이어 자제와 휘하무리를 이끌고 고려에 내조(來朝)하였다.

왕건은 순식의 세력권인 명주일대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동시에 순식이 그동안 구축한 여진족에 대한 영향력을 인정하여 파격적 대우로 맞아들여 왕씨성을 하사하고 대광(大匡)을 제수하였다. 아들 장명에게도 염(廉)이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원보(元甫)에 제수하였다.

935년(태조 18)에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神劍)군을 토벌할 때에는 명주로부터 기병을 이끌고 고려군에 가담하여 경상북도 구미의 일리천전투(一利川戰鬪)에서 유금필(庾黔弼)·정순(貞順) 등과 함께 중군(中軍)에 배치되어 후백제군을 격파하여 후삼국통일에 큰 공훈을 세웠다.


6세 장남 子 堅述(견술)◁
一名 堅術 諡號 克翼 倉部卿 三重大匡壁上功臣 惠宗廟 配享
憲安王 五年 辛巳生 高麗 太祖 二年 己卯 陞倉部卿(戶部尙書)◁

일명 견술(술자가 다름), 시호 극익, 창부경 삼중대광벽상공신, 혜종[2대 재위 943~945]묘에 배향됨
헌안왕[47대 재위 857~861] 5년 신사년 생, 고려 태조 2년 기묘년에 창부경(호부상서)에 오름

6세 차남 子 堅兢(견긍)◁
阿干◁

아간(阿干) : 신라시대의 관등. 아찬(阿飡) 아척간(阿尺干)·아찬(阿粲)이라고도 한다. 17관등 가운데 6등으로, 6두품(六頭品:得難) 이상이 받았다. 6두품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이며, 옷 색깔은 비색(緋色)이다.


6세 3남 子 堅宗(견종)◁
奈麻◁

내마(柰麻) : 신라시대의 관등, 나말이라고도 한다. 17관등 가운데 11등으로, 5두품 이상이 받았다. 옷 색깔은 청색(靑色)이다.

6세 4남 子 堅必(견필)◁

< 다음 호에 계속>

숙간공 백동파 도정공지파 38세 형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