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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관직(品官職) 행수법(行守法) 중시조(中始祖) ㅇㅇ공호(ㅇㅇ公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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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최고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12-04 14:57 조회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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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관직(品官職) 행수법(行守法) 중시조(中始祖) ㅇㅇ공호(ㅇㅇ公號)

1. 품관직(品官職)

품관직이란 품계(品階) 및 관직(官職)을 합친 용어로서 먼저 품계를 살펴보면 조선시대의 관리들은 30단계의 품계로 신분의 자급(資級)이 구분된다. 정1품, 종1품으로 시작해서 정9품, 종9품까지 일단 18품계가 있고 그중 정1품부터 종6품까지는 각 품마다 상계(上階)와 하계(下階)로 다시 세분되어 12품계가 더 추가되므로 조선의 품계는 모두 30품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1품 상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부터 정3품 상계 통정대부(通政大夫)까지 9품계를 모두 통칭하여 당상관(堂上官)이라 하고, 정3품 하계 통훈대부(通訓大夫)부터 종4품 하계 조봉대부(朝奉大夫)까지 7품계를 모두 통칭하여 당하관(堂下官)이라 한다. 그 밑의 정5품 상계 통덕랑(通德郞)부터 종6품 하계 선무랑(宣務郞)까지 8품계를 통칭하여 참상관(參上官)이라 하고 그 이하 6품계는 참하관(參下官)이라고 한다.

따라서 같은 정3품이라고 하더라도 상계 통정대부는 당상관이고 하계 통훈대부는 당하관으로서 신분의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를 군대계급으로 쉽게 풀이하면 소장(少將)과 대령(大領)의 차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즉 임금이 여러 중신(重臣)[보통 정2품 이상의 신하]들과 함께 나라의 정치를 의논하고 집행하는 곳을 조정(朝廷), 조당(朝堂), 묘당(廟堂)이라고 하는데 이 당(堂)에 오를[上]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신하들의 품계가 바로 정3품 상계 통정대부까지로 제한되는 것이다.

正1품 上階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정1품 下階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從1품 상계 숭록대부(崇祿大夫)
종1품 하계 숭정대부(崇政大夫)

정2품 상계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 하계 자헌대부(資憲大夫)

종2품 상계 가정대부(嘉靖大夫) 또는 가의대부(嘉義大夫)
종2품 하계 가선대부(嘉善大夫)

정3품 상계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 하계 통훈대부(通訓大夫)

오늘날에도 일상 언어사용에서 “따논 당상(堂上)”이란 표현이 있는데, 여기서 당상이란 당상관(堂上官)을 가리키는 것이며 곧 품계가 통정대부에 오른다는 것이다. 조선의 여러 관직들 중에서 반드시 당상관에 오를 수 있는 요직(要職)이 있는데, 정3품 당하관인 홍문관 직제학, 종3품인 사헌부 집의, 사간원 사간, 정4품인 사헌부 장령, 정5품인 사헌부 지평 또는 사간원 헌납, 이조 및 병조의 정랑 등이 대표적이며 아직은 당하관이지만 이러한 관직을 맡으면 곧 반드시 당상관에 오르게 된다. 오늘날의 의미로 풀이하면 “곧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품계는 개인적 자급으로서 환로(宦路) 중에 승자(陞資)되어 어떤 대부에 오르고 어떤 관직을 맡게 되면 나중에 임기를 채우고 사직하더라도 또는 어떤 가벼운 죄로 해직되더라도 그 관리의 품계, 즉 어떤 대부는 삭탈관직되지 않은 한 그대로 유지된다. 그후 무관직으로 고향에 있다가 조정의 경사의 있으면 특정한 관직을 제수받지 않은채 그냥 품계만 승자(陞資)되기도 한다. 즉 예를 들어 자헌대부에서 정헌대부로 승자되는 것인데, 이것도 개인의 큰 영광으로 간주된다.  

반면에 관직(官職)은 어떤 품계의 상계 및 하계를 구분하지 않고 정1품부터 종9품까지 18관직으로 구분하는데, 다만 여기서 정3품 상계 통정대부와 하계 통훈대부는 당상관과 당하관으로 구분하므로 조선의 관직은 모두 19관직으로 구분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이라고 하면 여기서 의정부는 관(官)이고 영의정은 직(職)을 뜻하는 것이며, 조정의 수장인 의정부영의정을 맡을 수 있는 관리(官吏)의 품계는 정1품인데, 정1품이 맡을 수 있는 그 밖의 관직은 본직(本職)으로 의정부 좌의정 및 우의정, 돈녕부(敦寧府) 및 중추부(中樞府)의 영사(領事) 등 5개 뿐이며, 그리고 겸직(兼職)으로 경연(經筵)[임금이 공부하는 곳]의 영사, 또 각 아문(衙門)의 도제조(都提調), 도체찰사(都體察使) 등이 있다. 다만 영사[정1품], 판사(判事)[종1품], 지사(知事)[정2품], 동지사(同知事)[종2품] 등의 관직은 영-돈녕부-사, 영-중추부-사, 판-의금부-사, 동지-경연-사 등으로 관직을 표현한다.    

정2품이 맡을 수 있는 관직은 가장 유명한 게 이조판서 등 6조의 판서, 홍문관 및 예문관의 대제학, 한성부의 판윤, 즉 한성판윤 등이고, 또 사헌부 대사헌은 종2품이고, 사간원 대사간 및 승정원 승지 등은 정3품 당상관이다. 지금까지는 모두 문관(文官) 경관직(京官職)이다.

그밖에도 문관 외관직(外官職)이 있는데, 경기도의 경우 각 관(官) 또는 권역(權域)의 수장으로서 1명의 관찰사(觀察使)[종2품], 4명의 목사(牧使)[정3품], 7명의 도호부사(都護府使)[종3품], 7명의 군수(郡守)[종4품], 5명의 현령(縣令)[종5품], 조운(漕運)의 경우 2명의 판관(判官)[종5품], 14명의 현감(縣監)[종6품], 역(驛)의 경우 3명의 찰방(察訪)[종6품] 등 주로 종품직(從品職)이 있다. 흔히 아전이나 백성으로부터 “사또나리”라고 불리는 사람은 보통 종6품 현감를 가리키는 것이며 또는 넓게 보면 종5품 현령이나 종4품 군수까지도 이를 수 있다.

2. 행수법(行守法)

그런데 관리들의 품계와 관직은 오랜 환로를 거치면서 톱니바퀴 돌아가듯 그렇게 딱딱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드물다. 예를 들어 이미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에 올랐다가 사직하고 있던 관리가 다음에 종2품 관직인 홍문관 제학을 제수받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이 경우 관리의 품계는 높고 관직은 낮은데, 즉 품고직저(品高職低)의 현상이 나타난다. 이럴 때 그 관직 앞에 행(行)자를 붙여 자헌대부 행홍문관제학((資憲大夫行弘文館提學)으로 표현 - 한문의 경우 띄어쓰기를 하지 않음 - 하고 그 직을 행직(行職)이라고 하며, 또 현직 이조판서로 있다가 인사이동으로 홍문관 제학을 옮겨맡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반면에 정4품 상계 봉정대부(奉正大夫)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있던 관리가 어떤 정세변화 때문에 품계의 승자없이 1단계 위 관직인 홍문관 전한(典翰)[종3품]이나 심지어 2단계 위 관직인 광주목사(廣州牧使)[정3품]로 승진발령나는 경우도 생기는데, 즉 품저직고(品低職高) 현상이 나타난다. 이럴 때 그 관직 앞에 수(守)자를 붙여 봉정대부 수광주목사(奉正大夫守廣州牧師)로 표현하고 그 직을 수직(守職)이라고 한다. 행직의 경우는 비교적 제한이 없지만 수직의 경우는 상당히 까다로운 절차 및 관행이 있으며, 이러한 행직 및 수직의 관행을 통틀어 행수법이라고 칭한다.

3. 행수법의 사례들

행수법의 사례들은 왕조실록 편수관 명단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성종실록 편수관 명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통훈대부 행 사헌부집의(通訓大夫行司憲府執義) 신(臣) 이유청(李惟淸)
중훈대부 행 의정부사인(中訓大夫行議政府舍人) 신(臣) 이세영(李世英)
봉직랑 행 사헌부감찰(奉直郞行司憲府監察) 신(臣) 이효돈(李孝敦)
봉훈랑 행 예조좌랑(奉訓郞行禮曹佐郞) 신(臣) 유희저(柳希渚)

봉정대부 수 종부시정 지제교(奉正大夫守宗簿寺正知製敎) 신(臣) 이달선(李達善)
봉직랑 수 병조정랑 지제교(奉直郞守兵曹正郞知製敎) 신(臣) 김감(金勘)
봉직랑 수 예조정랑 겸 승문원교리(奉直郞守禮曹正郞兼承文院校理) 신(臣) 성세정(成世貞)

이유청의 경우 정3품 하계 통훈대부가 사헌부집의[종3품] 관직을,
이세영의 경우 종3품 하계 중훈대부가 의정부사인[정4품] 관직을,
이효돈의 경우 종5품 상계 봉직랑이 사헌부감찰[정6품] 관직을,
유희저의 경우 종5품 하계 봉훈랑이 예조좌랑[종6품] 관직을 맡았음으로 각 관직 앞에 행(行)자가 붙었다.

이달선의 경우 정4품 상계 봉정대부가 종부시정[정3품 당하] 관직을,
김감의 경우 종5품 상계 봉직랑이 병조정랑[정5품] 관직을,
성세정의 경우 종5품 상계 봉직랑이 예조정랑[정5품] 겸 승문원교리[정5품] 관직을 맡았음으로 각 관직 앞에 수(守)자가 붙었다.

성종실록 21권, 3년(1472 임진 / 명 성화(成化) 8년) 8월 27일(신묘) 5번째기사

서근(徐赾)을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사헌부 지평(行司憲府持平)으로,
김제신(金悌臣)을 봉정대부(奉正大夫) 행 사간원 정언(行司諫院正言)으로,
조종지(趙宗智)를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성천 부사(行成川府使)로,
성순조(成順朝)를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삼았다.

서근의 품계는 이미 통훈대부[정3품 당하]인데 이번에 사헌부 지평[정5품]을, 김제신의 품계는 이미 봉정대부[정4품 상계]인데 사간원 정원[정6품]을, 조종지는 통정대부[정3품 당상]의 품계에서 성천부사[종3품]을 맡게 됨으로써 관직 앞에 행(行)자가 붙은 경우이다.

4. 행수법(行守法)과 묘비문(墓碑文)

가. 김홍권 묘비문

비석(碑石)의 앞면을 비양(碑陽)이라 하고 뒷면 또는 측면을 비음(碑陰)이라 하는데, 비양의 오른쪽에 당사자 본인의 품관직과 그리고 왼쪽에 배우자의 품계 및 본관을 큰글씨[보통 전서(篆書)]로 새기고, 기타 여백에 부좌(부좌) 및 부우(부우) 표시를 하게 된다. 그리고 비음에는 당사자의 행장(行狀)을 작은 글씨로 새긴다.

이러한 비양문 중에서 강김 선조 숙간공 백동파 도정공지파조 28세 홍권(弘權)의 비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朝鮮  贈資憲大夫 吏曹判書 兼知
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行通
政大夫敦寧府都正江陵金公弘權之墓
贈  貞 夫 人  韓 山 李 氏  부

崇禎紀元後 三 丙戌  月 日 立

김홍권은 1657년(효종 8)에 태어나 1735년(영조 11)에 향(享) 79세로 졸하신 분인데 음직(蔭職)으로 출사(出仕)하여 주로 호조에서 근무하시다가 만년에 돈녕부 도정을 제수받고 얼마 동안 근무하다가 치사(致仕)하셨다. 즉 최종관력은 도정부 도정[정3품 상계 通政大夫]이다. 공의 사후 후손들[子 시영(始煐), 孫 상집(尙集)]이 추증(追贈)을 신청하였고 어느 때인지 정확하게 고증할 순 없지만 아무튼 위 비문에 나와있는 것처럼 자헌대부[정2품 하계] 이조판서[정2품 관직] 겸 지의금부사[정2품 관직] 오위도총부도총관[정2품 관직]이 추증(追贈)되었다. 따라서 배위 한산이씨도 원래의 숙부인(淑夫人)[정3품 당상관 문무관처의 품계]에서 정부인(貞夫人)[2품 문무관처의 품계]로 승자된 것이다.

그리고 위 비석의 설립시기는 숭정기원후 3 병술[1766, 영조42]로 되어있어 공의 사후 무려 31년만에 설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숭정(崇禎)은 중국 명(明)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 장열제(莊烈帝)의 연호(年號)이며 숭정연간(崇禎年間)은 1628년(인조 6)~1644년(인조 22)에 해당한다. 중국대륙에서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 상국(上國)이 되었지만, 숭명사상(崇明思想)에 젖어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조선의 관료들은 가능하면 살아있는 청나라를 배척하고 죽고없는 명나라를 계속 수용하려는 한심한(?) 노력을 계속했는데, 이러한 현상은 조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청나라의 간섭이 거의 배제된 향리에서 비문을 통해 가장 잘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숭명사상의 가장 큰 표식은 비문 첫머리에 유명조선(有明朝鮮)을 새기는 것이고 또 설립연도를 표시할 때 명나라 연호였던 숭정을 계속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숭정기원후 숫자 간지”를 표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정의 공식기록은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는데 1826년은 도광 6년에 해당한다.

위 김홍권의 품관직을 표기한 비문에 행(行)자가 들어있는데, 여기서 행(行)자의 의미는 묘의 주인공이 “실제로 돈녕부 도정을 맡았다”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행수법(行守法)의 표현일 따름이라는 사실이다. 증직은 실직보다 더 높은 품관직이 제수되므로 증직이 표시된 비문은 모두 행(行)자가 들어가게 마련이다. 만약 추증되지 않았다면 김홍권의 비문은 通政大夫 敦寧府都正 江陵金公 弘權之墓 라고 표기되었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행(行)자를 덧붙히지 않는데, 그렇다면 위 관직을 맡은 적이 없다는 것인가.

나. 김충엄과 심온의 묘비문

앞서 장포공 김행과 사위 동강 김우옹<3>(2011-06-14)에서 장포공의 차남 충엄의 비문<세로쓰기>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다시 본고에 인용하기로 한다.

淑人 平山 申氏
江陵 金公 忠淹   之墓
通訓大夫連山縣監

심온묘(경기도 기념물 제53호)를 답사하고 인터넷에 올린 자료가 있어 심온의 묘비문을 여기에 인용하기로 한다.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에 자리잡고 있는 심온묘역 입구에 靑松心氏 安孝公墓所 란 표시석이 있으며 심온[세종의 장인]의 외손자인 안평대군[세종의 3남]이 썼다고 하는 묘비문은 다음과 같다.

有明朝鮮國 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府事 領書雲觀事 靑川府院君 贈諡安孝沈公之墓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oggum28&logNo=10068613899

청송심씨 심온(1375~1418)은 10대 후반에 고려문과에 급제하고, 1408년(태종 8)에 딸이 충녕대군[세종]에게 출가함으로써 태종의 사돈이 되었고, 1418년(세종 즉위년)에 사위 충녕대군이 즉위함으로써 국구[왕의 장인]가 되어 영의정에 올랐으나, 세종의 처가쪽 세력의 확장을 우려한 상왕 태종에 의해 반역죄로 사사되었다. 이른바 ‘무술옥사’라고 하며 당시 44세의 나이였다. 정1품 상계 대광보국숭록대부의 품계에 올랐으며, 의정부 및 서운관[관상감]의 영사직을 맡았고, 국구로서 청천부원군이란 군호(君號)가 수여되었다. 친정아버지를 복권해달라는 중전 심씨의 요청을 세종은 부왕의 결정이라며 끝내 거절하였는데 마침내 1451년(문종 1)에 복권되고 안효(安孝)가 증시되었다. 풀이하면, 화친(和親)한 것을 좋아하여 다투지 않음을 안(安)이라 하고, 오종(五宗)[증조부, 조부, 부, 자, 손]을 편안하게 한 것을 효(孝)라 하였다[謚安孝公: 好和不爭安, 五宗安之孝]

5. 중시조(中始祖) ㅇㅇ公派

가. (시호)공파[(諡號)公派]

시조(始祖)의 사손(嗣孫)은 적장손(嫡長孫) 대종가(大宗家)를 구심점으로 이어져 오지만, 차남이하의 자손들 중에서 뛰어난 인물이 배출되면 그를 중시조(中始祖)로 삼아 “ㅇㅇ公派”로 계속 분파하게 되는데, 물론 가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이때 우선 고려되는 것이 바로 시호(諡號)이다. 청송심씨 심온의 경우 시호를 따서 안효공파로 분파되었다.  

나. (관직)공파[(官職)公派]

그런데 후손들의 입장에서 높은 벼슬을 하고 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조상이라고 하더라도 조정에서 반드시 시호를 내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호는 아무나 받을 수가 없다. 이럴 경우 흔히 최고위 관직을 분파의 명으로 삼는다. 예를 들어 이조판서을 역임했으면 판서공파, 한성판윤을 역임했으면 판윤공파, 고려시대 시중(侍中)을 역임했으면 시중공파 등등이 바로 그러하다.

다. (아호)공파[(雅號)公派]

아호를 분파명으로 삼는 경우도 상당히 많은데 이때는 주로 출사를 거부하고 향리에서 학문을 연구하거나 제자들을 양성했던 뛰어난 학자들에게 해당한다. 높은 벼슬을 했고, 또 조정으로부터 시호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를 마다하고 아호를 분파명으로 삼는 경우도 많이 있다.  

라. 기타

공신들이나 부마들의 경우 ㅇㅇ君, ㅇㅇ府院君, ㅇㅇ伯, ㅇㅇ尉 같은 군호(君號)나 작위(爵位)를 받게 되는데, 이 군호나 작위를 분파명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6. 강릉김씨 분파명 고찰 및 분석 <다음 호에 계속>

숙간공 백동파 도정공지파 38세 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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