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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 이언적의 경우 2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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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최고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12-04 14:52 조회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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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옥결은 양부 조윤손의 본가에서 출생할 당시 이미 30세 연상의 누나들이 있었고, 대략 18~20세 전후하여 결혼했을 텐데, 처가를 확인할 수 없지만 아무튼 혼사는 양부의 주관하에 진주출신의 어느 규수와 결혼하여, 24세에 진주에서 아들 조oo 를 낳았는데, 아들의 이름도 양조부가 지어주었을 것이다. 둘째아들도 있는데, 나중의 이름이 이순(李淳)이며 생몰연대를 확인할 수 없지만, 두세살 터울로 본다면 조옥결이 생부를 찾아 강계로 갔을 때 4~5세 정도였을 것이고, 이 이름도 생조부 이언적이 조옥결을 李全仁으로 개명할 때 함께 형 준(浚)처럼 개명해주었을 것이다. 손자들의 이름이 물수변 부수 돌림자에 외자이다.

반면에 이언적의 양자 應字 돌림 應仁의 생몰연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응인에게 다섯 아들이 있었고, 장남 宜潤[宜字 돌림]이 1564년(명종19)에 출생한 것으로 보아서, 응인은 일찍 20세 정도에 의윤을 낳았으면 1544년생이거나 늦게 30세 정도에 낳았다면 1534년생 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아들을 다섯이나 두었고 그밖에도 여러 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면 장남 의윤을 대략 20세 정도에 낳았을 것으로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그렇다면 應仁은 1544년생 정도인데 서형(庶兄) 全仁과 무려 20~25세 정도 차이가 나고 거의 아들뻘이다. 그리고 서종형제간(庶從兄弟間)인 이준과 이의윤의 나이차도 무려 24살 터울이다.

서자 이전인이 적소(謫所) 강계에서 생부 이언적을 7년 동안 봉양하다가 언적이 1553년(명종8) 11. 30. 사망하였을 때, 엄동설한에 3개월에 걸쳐 아버지의 시신을 얹어 경주로 모시고 온 대나무가 아직도 이전인 집안[옥산파]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하늘도 감동했을 것이다. 응인의 입장에서 보면 전인이 비록 서형이지만 거의 아버지뻘이고, 양부를 직접 봉양한 대효(大孝)이고 또 고귀한 인격과 높은 학식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을 것이고, 이러한 입장은 함양박씨 부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 집안에서 장남에게 후손이 없을 때 보통 차남의 여러 아들중 장남을 양자로 들이는게 보통인데, 이언적의 동생 언괄도 자식이 없어 양자를 들여야만 했다. 그래서 이언적은 숙부 苾의 장남 通의 3남 應仁을, 동생 언괄은 숙부 필의 2남 道의 2남 應期를 양자로 들였다.

1彦迪    양자 應仁    宜潤 외 4남(宜澄, 宜活, 宜僭, 宜澤)
   서자 全仁    浚 외 1남(淳)

2彦适    양자 應期    宜澍 외 1남(宜洽)

언적의 자식들 應仁과 全仁만 보면, 마치 仁字 돌림 같지만 족보상 應字 돌림이다. 그런데 숙부 苾의 4남 運의 아들 이름이 讚仁이다. 이렇게 보면 여주이씨 족보의 항렬자(行列字)는 “應--” 인데, 부가적으로 “--仁”도 허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應仁의 경우에는 공교롭게도 주항렬자 應--과 부항렬자 --仁이 모두 적용된 경우라고 할 것이며, 언적은 조옥결을 개명할 때 부항렬자 --仁에 맞추어 全仁으로 했다고 봐야 한다. 생부 언적의 입장에서 보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손자들의 경우 족보상의 주항렬자 宜--를 따르지 않고 물수변 부수에 외자를 적용하므로써 서자 후손들의 출신성분을 이름에서부터 달리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通의 장남 應麟의 아들 이름이 추(樞)로서 나무목 부수에 외자를 사용하므로써 외자 사용이 완전히 예외적인 경우는 아니라고 해도, 언적이 직접 서손(庶孫)의 이름에 浚과 淳의 경우처럼 나무목 부수가 아니라 물수변 부수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역시 달리했다.  
   
또한 應仁의 다섯 아들과 應期의 두 아들은 첫글자에 宜字 돌림이고 두 번째 글자에 물수변 부수를 적용한 어떤 글자인데, 공교롭게도 의참(宜僭) 만큼은 사람인변의 어떤 글자를 사용하여 다르다. 굳이 물수변 부수의 어떤 자를 찾았다면 잠(潛)으로 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의외다. 의참의 경우에는 사주와 작명을 따져 물수변 부수를 따르지 않고 예외적으로 사람인변 부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상황이 있었을 것이다.

< 여주이씨 이언적 가계도 - 첨부파일>    

여주이씨 이언적 집안의 개명과 작명은 그 집안의 전통일 뿐이고 강릉김씨인 필자와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또한 필자의 분석이 실제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과 관심이 나중에라도 강릉김씨의 조상님들의 항렬자를 고증할 때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본 내용은 무엇보다도 너무나 막연하게 소개되고 있는 이언적-이전인 일화(逸話)에 대해서 학술적으로 고증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한 예로 KBS 역사스페셜이 위 내용을 방송할 때, 이언적에게는 良人 後妻 소생의 서자 이전인이 있었다, 고만 소개하므로써, 필자는 그 당시 이언적과 함양박씨 부인 사이에 아들이 없으니까 이언적이 부인 양해하에 양인[여기서는 양반도 아니고 천인도 아닌 평민] 처자를 후처로 들였고 서자 이전인을 어려서부터 부양했었구나, 라고 막연하게 가정하게 되었는데, 지금 따지고 보면 당시 KBS가 <기문총화>의 조윤손, 경주기생, 이언적 일화 및 30년 만의 상봉 등의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경주 양동마을이 세계문화유산 등재되므로써 종인 여러분들도 양동마을을 방문하는 기회를 갖게될 것인데, 양동마을 홈페이지나 기타 인터넷에서 그냥 간단하게 소개되고 있는 "월성손씨와 여주이씨 두 집안의 후손들로 형성된 마을"이란 상식적 내용을 조금 더 자세하게 연구하여 곧 <3부>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숙간공 백동파 도정공지파 38세 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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