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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 이언적의 경우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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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최고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0-12-04 14:52 조회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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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자상봉

생부 이언적과 서자 이전인이 머나먼 유배지 강계[평안북도 강계군]에서 극적으로 상봉하게된 경위가 <기문총화>에 수록되어 있는데,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으며, 먼저 양부 조윤손의 본가는 경남 진주이고, 생부 이언적의 본가는 경북 경주라는 사실을 먼저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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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은 젊은 시절에 정을 둔 기생(妓生)이 있었다. 그녀가 임신(姙娠)한 지 몇 달이 되지 않아 지사(知事: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 정2품부터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종3품까지의 벼슬)로 있던 조윤손(曺潤孫)이 그녀를 보고 마음에 들어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해산달이 되어 아들을 낳자, 조윤손은 이름을 '옥결(玉缺)'이라 지었고, 장성(長成)하자 후사(後嗣)로 삼고 집과 논밭, 노비(奴婢)들을 문서(文書)로 작성하여 주었다. 이언적이 조윤손에게 장난삼아 말했다. "첩(妾)이야 공이 마음대로 가지지만, 아들놈은 어째서 돌려보내지 않습니까?" 조윤손은 그저 한 차례 웃을 뿐이었다.

조윤손이 죽자 조옥결은 장례를 치르고 여묘(廬墓)살이를 하는데, 이언적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어머니한테 물으니, "너는 사실 회재 선생의 아들이니라"고 했다. "저는 조씨댁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의리상 상례(喪禮)를 마치겠습니다." 옥결은 상례를 마치고 물려받은 문서를 조윤손의 자제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경주(慶州)에 가서 회재 부인에게 그 사실을 아뢰었다. 부인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이언적의 유배지(流配地)에 가보라고 했다. 옥결이 강계(江界) 유배지로 회재를 찾았더니, "너는 과연 내 아들이니라[汝果我子也(여과아자야)]"하고는 이름을 전인(全仁)으로 고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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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문총화는 현재 번역본이 출간되어 있으나, 필자는 위 책을 구하지 못한 관계로 부산 국제신문에 연재되었던 “이신성의 한자여행” 중에서 “회재 이언적의 紀行”(2006.11.01)을 재인용하였습니다.

* 여기서 지사(知事)에 대한 설명이 좀 이상하고 부정확하다. 지사는 돈녕부[본직 1명], 의금부[본직은 없고 겸직 약간명], 경연[본직은 없고 겸직 3명] 등 왕의 직계아문 문반이나 무반 중추부[본직 6명]에 있던 정2품 관직인데, 문반은 자문역할을, 무반은 호위 및 자문역할을 맡는다. 관직명을 표현할 때는 知敦寧府事[지-돈녕부-사] 처럼 지와 사의 사이에 관명을 적는다.

*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 “지사간원사” 란 관직명이 실제로 쓰였는지 필자는 의문이고 현재 확인하기도 어려운데, 사간원의 수장은 大司諫[정3품 당상]이라고 한다.

* 여러 관직을 거친 경험많은 늙은 신하에게 나중에 - 사실상 명예직으로 - 지사직이 제수되는게 보통인데, 조윤손도 늙어서 실제로 지중추부사에 제수되기는 하지만, 조윤손이 경주 기생과 관련해서 당시 지사직에 있었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며 역사적으로도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사는 한성에 주재하기 때문에 경주 및 경주기생과 상관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 조윤손은 당시 경상좌도[경상북도] 경주진관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정3품 무관직]로 있었으며, 따라서 이전인의 생모 기생은 경주진관 소속 관기(官妓)였는데 조윤손이 면천(免賤)하고 첩으로 삼아 데리고 갔다는 것이며 아울러 그 기생이 재색겸비(才色兼備)였다는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기문총화>의 이언적 일화 기사 원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 <기문총화>의 저자는 경주기생 사건 당시와 상관없이 보통 최종관직을 적어 조윤손에게 “지사 조윤손” 이라 표현한 것을 위글의 필자 이신성씨가 “조윤손이 당시 지사직에 있었다” 고 잘못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품관직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생긴 실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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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위 기사에서 헤아릴 수 있는 것은 1) 이전인의 그전 이름이 조옥결(曺玉缺)이었고, 2) 양부 조윤손도 옥결의 생부가 이언적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3) 핏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의 전재산을 증여하는 등 후사(後嗣)으로 삼았다, 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玉缺”이란 이름의 의미가 참 묘하다.

구슬옥자에 흠결자를 써서 “옥결”이라 하였는데, 풀이하면 “흠이 있는 구슬” 정도가 되며, “玉”은 “玉童子”에서 보듯 “귀한 아들”의 의미도 있으므로, 전체적으로 “흠이 있는 귀한 아들” 정도가 된다. 다른 한편으로 “옥결”은 일명 “귀걸이”이 대한 한자식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데 “귀걸이”는 한편으로 멋진 장신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귀걸이가 흔히 그러하듯 언제든지 잃어버릴 수도 있는 장신구이므로, 그렇다면 조윤손은 옥결에 대해서, 1) 대를 이을 아들, 2) 언제든지 떠나버릴 수 있는 아들, 이란 상반된 감정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준다. 이런 상황을 문학적 전문용어로 "앰비발랜스(ambivalence)" 라고 하는데, 흔히 “애증(愛憎)”이라고 하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의 하나이다.

먼저 창녕조씨 조윤손에 대한 한국대백과사전 인물편의 약력내용을 직접인용하기로 한다.

조윤손(曺潤孫)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창녕(昌寧). 대사헌 숙기(淑沂)의 아들이다.
1502년(연산군 8) 무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선전관이 되었으며, 1506년 유빈(柳濱)·윤상로(尹湯老) 등과 협의하여 연산군을 폐하려 하였으나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 등의 반정이 먼저 성공하였으므로 공신녹권(功臣錄券)만을 받았다.
1509년(중종 4) 웅천현감이 되어 남해안 일대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으며, 1512년 갑산부사로 야인을 토벌하였다. 이듬해 함경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으며, 1523년 야인이 여연(閭延)·무창(茂昌)에 침입하여 점차로 부락을 형성하려 하는 것을 몰아냈다.
1528년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여 다시 야인의 침입을 격퇴하고, 1533년 한성부판윤, 1536년 병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렀다. 시호는 장호(莊胡)이다.

* 곧이어 <2부-2> 가 연재될 예정입니다.

숙간공 백동파 도정공지파 38세 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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