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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金時習)
영 정 : 부여군 외산면 무량사 소장
청 간 사 :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명주군왕능 경내
서산서원 : 경남 함안군 군북면 원복리
충순위 일성(日省)의 자로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나 5세에 이미 신동(神童)으로 소문난 천재로 알려젔다 세종이 이 소식을 듣고 장래에 크게 쓰리라 전지까지 내렸다.
그뒤 13세까지 수찬 이계전(李季甸),성균관 대사성 김반(金泮), 별동 윤상(尹祥)등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비롯한 각종사서와 제자서를 배워 익혔다. 21세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소식을 듣고 보던책을 모두 모아 불사르고 스스로 삭발하고 전국을 유랑하였다 송도를 기점으로 관서지방을 유랑하여 24세때 당시에지은 글을모아 세조4년 (1458)에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을 엮었다 그후 주로 삼남지방을 유랑하면서 1463년에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1465에 경주 금오산 용장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 《금오신화(金鰲神話)》를 비롯한 수많은 시편 《유금오록(遊金鰲錄)》을 남겼다 또 성종때 폐비윤씨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 등지로 방랑 길에 나서서 지방청년들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시와 문장을 벗 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는데 《관동일록(關東日錄)》에 있는 100여편의 시(詩)가 이 기간에 쓰여진 것이다. 공은 10대에 학업에 전념하였고, 20대에 소오산수(嘯傲山水)하며 천하를 돌아 다녔으며 30대에 정사수도(靜思修道)로 인생터전을 닦았고, 40대에는 더럽고 짜증스러운 현실을 냉철히 비판하고 행동으로 항거하다가 50대에 초연히 낡은 허울을 벗어 버리고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충청도 부여 홍산 무량사에 들어 이곳에서 59세에 별세하였다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청간사 |
서산서원 |
김세민(金世敏)位 祠堂
소재지 :강원도 삼척시 우지동 1번지
호는 장육(藏六) 증통훈대부 장낙원정 증 진사로 효우가 돈독하고 시(詩)와 문필(文筆)에 대가였다
열녀각(烈女閣)
소재지 : 동해시 운곡동 까차불
종후(宗厚)의 처 홍(洪)씨 효열........효지(孝之)의 손부(孫婦) 1841년 신축년에 열녀(烈女) 정려
창효각(彰孝閣)
소재지 : 문경군 삼북면 석봉리 이정곡
연호(演鎬) 효자 증 홍문제학
증공판(工判) 돈혁(敦爀)의 자로 부모봉양이 지극하여 집안이 어렵고 모친병환이 위독 하여 노심초사하는데 꿈에 선몽하여 산삼(山蔘)을 얻어 30년을 연명토록 하는등 효성의 소문이 널리 퍼저 사림(士林)의 천거(薦擧)로 81세에 기로소에 들었는데 임금이 기로소를 들려 소식을 듣고 증직으로 가선에 올려 주었으며 그후 자헌대부 중추부사와 홍문제학에 가자(加資) 받고 효행에 정려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