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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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png 12 송오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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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계초(繼貂)부사

예부시랑 웅(雄)의 3자로 문무를 겸비하여 국자감박사(國子監博士)로 출사하고 충열왕조에 통례문부사에 오르고 차자 광을(光乙)이 찬화이등공신이 되었으며 광록대부로 가자되었다.

 

18세 광갑(光甲)

부사 계초(繼貂)의 장자인데 문음(門陰)으로 예부전례사원외랑(禮部典禮司員外郞)으로 출사하여 전례사총랑(典禮司摠郞)을 거처 충혜왕 10년(1361)에 전라도 안염사(安廉使)를 지냈고 전법민부전리총랑(典法民部典理摠郞)을 역임하였으며 장자 사혁(斯革)이 홍적을 격파한 공로로 금자광록대부 정당문학참지정사겸 판상서복야(정2품)로 가자되었다.

 

19세 사혁(斯革) 충절. 상원수

총랑 광갑(光甲)의 장자로 고려의 무신.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이 개경을 침공하자 이를 수복한 공으로 1363년에 이등공신이 되었다. 우왕 2년(1376)에 공주목사로 있을때 공주에 침입한 왜구를 정현(鼎峴)에서 맞아 싸우다가 패하였으나 그뒤 여러차례에 걸처 충청도와 전라도에 침입한 왜구를 무찔러 전공을 세웠다 1380년에 전리판서(典理判書)로서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가 되었으며 이어 양광도 원수(元帥)가 되어 부여와 계룡산 일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다.1385년에는 양광도 상원수가 되어 축산도(丑山島)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고 지문하사(知門下事)가 되었다. 호는 충절 이다

 

20세 승로(承露) 지인주사 조봉대부

충절공 사혁(斯革)의 장자로 포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내직으로 출사하여 사헌형부외 전주현(司憲刑部外典州縣)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 하면서 정권을 잡자 운곡 원천척(耘谷 元天錫)등 동지들과 송악강사(松岳講舍)에 들어가 조복을 찢어버리고 통곡하며 벽촌에 음거하였다 후에 태종이 공의 청절을 알고 대사헌에 제수하였으나 끝내 불사하고 98세에 세상을 떠났다 세종조에 숭록대부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21세 백훈(伯塤) 이조참의

송오공 승로(承露)의 장자로 태종조에 내자시 봉사로 출사하여 직장,주부.판관을 거처 결성현감을 역임하고 내직의 이조정랑과 내자시 부정을 거처 이조참의를 역임하였다

 

22세 맹아(孟雅) 주부

참의 백훈(伯塤)의 2자로 음사로 제용감의 봉사로 출사 양현고(養賢庫)의 주부(注簿)(종6품)을 역임했다

 

23세 빈(빈) 참의

주부 맹아(孟雅)의 장자로 세조조에 음사로 봉상시 봉사로 출사하여 제용감 직장, 주부를 거처 성종조에 호조,이조정랑 홍문관 전한을 거처 연산조에서 예조참의에 올랐다 연산조 4년(1498)에 사관(史官) 이극돈의 사초(史草)의 발단으로 훈구파 이극돈 류자광이 이들을 역적으로 몰아 사화로 멸문지화를 당하고 사사되었다

 

24세 수의(守義)예조참의   빈(빈)의 장자로 부친이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사사되자 우거하였다.

 

24세 옥성(玉聲) 어모장군 (홍원파조)

예조참의 빈(빈)의 2자로 음직으로 오위부사용으로 출사하여 사정과 사과를 지내고 북청진수군첨절제사에서 연산조에 어모장군에 올랐으나 부친 빈(빈)이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도 홍원군 평포면 와하리에 우거하였다 공의 자 휘(煇)의 후손이 화가 두려워 진천김씨로 분관하여 오다 1982년에 송오공파로 복귀하였다

 

25세 휘(煇)참봉

어모장군 옥성(玉聲)의 장자로 음사로 제용고 봉사(종8품)로 출사하여 연산조에 직장으로 재임중 조부가 무오사화에 연루되여 부친을 따라 북청 홍원에 갔다

 

26세 응벽(應璧) 선교랑 교수   직장 휘(煇)의 장자로 선교랑(宣敎郞)교수를 지냈다

 

27세 대호(大護) 훈도   부 응벽(應璧),

 

28세 득려(得礪) 훈도   부 대호(大護),

 

29세 신경(藎卿) 훈도   부 득려(得礪),

 

36세 철근(哲根) 고성훈도   원명(元鳴)의 6세손,

 

단천파

24세 옥규(玉奎) 어모장군

예조참의 빈(빈)의 3자로 오위부사맹(五衛部司猛)으로 출사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으나 부친 빈(빈)이 연산조 4년 무오사화에 연루됨으로 형 옥성(玉聲)과 함께 함경도 단천군 귀복면 로동리에 음거하며 진천김씨로 분관하여 오다 1982년 송오공파보를 수보할때 강릉김씨로 환성하였다

 

25세 숭백(崇伯)어모장군

어모장군 옥규(玉奎)의 장자로 충무위 소속인 북청 진관하의 부사용으로 출사하여 부 사맹.사정. 사과를 거처 혜산진관 첨절제사(정4품)를 지내고 어모장군으로 승품하였다

 

23세 봉(鳳) 어모장군

주부 맹아(孟雅)의 3자이고 음사로 충무위사맹으로 출사하여 경흥진관사정사과(慶興鎭管司正司果)를 거처 종성진첨절제사(鍾城鎭僉節制使)를 지내고 어모장군으로 승품되었다 (종성군 龍溪面 元鍾山洞)

 

24세 혁지(赫之) 어모장군(禦侮將軍)

어모장군 봉(鳳)의 장자로 함경도의 최북단인 회령진관(會寧鎭管)의 첨제사(僉制使)의 임기를 마치고 함경도 종성진에 귀향하고 진천김씨로 분관하여오다 1982년 송오공파보에 복귀하였다.

 

25세 유비(有斐) 제용감 참봉   어모장군 혁지(赫之)의 자,

 

26세 처원(處元) 어모장군 부사직   제용감참봉 유비(有斐)의 자,

 

26세 광조(廣祖) 이조참의   어모장군 숭백(崇伯)의 자,

 

27세 응진(應珍) 진현관 대제학 창열공신   광조(廣祖)의 자,

 

27세 준걸(俊傑) 어모장군 행용양위부호군   처원(處元)의 장자,

 

28세 극례(克禮) 장악원정   대제학 응진(應珍)의 자,

 

28세 극지(克智) 전력부위 권지훈련원부봉사   응진(應珍)의 차자,

 

29세 득제(得悌) 제2훈련원 부봉사   극지(克智)의 장자,

 

29세 경인(敬仁) 전력부위

상의(尙義)의 자로 임난 의병으로 참전 공훈하였으나 주위의 시기로 무고하여 상직에 불과한 전력부위 수문장을 하였으나 광해조때 통정대부로 가자받고 사후 사림에서 창의사에 배향하고 가선대부 호조참의겸 의금부도사로 증직 받았다

 

30세 예현(裔顯) 공조참의겸오위부부총관   장악원정극례(克禮)의 손자,

 

30세 대양(大洋) 만호

경인(敬仁)의 자로 광해12년에 무과에 등제 현신교위수명천진관 병마만호를 역임하였다

 

23세 학(鶴) 장사랑

주부 맹아(孟雅)의 4자로 장사랑 참봉을 지내고 황해도 곡산군 도화면 학천리에 세거하여 곡산파조가 됨.

 

26세 차석(此石) 장사랑   효인(效仁)의 장자,

 

27세 여 (礪) 공조참판   효인(效仁)의 손자,

 

28세 구용(九容).공조참의   여(礪)의 자,

 

29세 응호(應虎) 공조참의   구용(九容)의 2자,

 

29세 내호(乃虎) 장사랑   구용(九容)의 4자,

 

30세 극감(剋鑑). 장사랑   응호(應虎)의 자,

 

30세 만철(晩哲) 군자감정   구용(九容)의 차자 여호(汝虎)의 장자,

 

전의

22세 중아(仲雅) 통훈대부 청양현감

이조참의 백훈(伯塤)의 2자. 음직으로 출사 청양현감을 거처 통훈대부에 승품되었다

 

23세 소 (韶) 홍산현감 강원도 관찰사

중아(仲雅)의 장자. 음직으로 출사 홍산현감을 지내고 통정대부로 승품되었다

 

24세 수례(守禮) 진사 천안군수

군수 소(韶)의 장자 중종(1414)에 문과시 진사과에 장원하여 성균학사에 등용되고 당대 문장가로 명성이 높았다. 뒤에 천안군수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다 (천안읍지,전의읍지)

 

25세 익(翼) 참봉   군수 수례(守禮)의 장자 예빈시 참봉,

 

25세 습(習) 진사   군수 수례(守禮)의 2자로 진사과에 등제되고 사마에 천거되었으나 불사하였다

 

25세 흡(翕) 훈련원 참봉   천안군수 수례(守禮)의 3자로 구지동 파조,

 

26세 태수(태壽) 참봉 효자   참봉 익(翼)의 2자,

 

26세 해수(海壽) 부여현감   참봉 흡(翕)의 장자,

 

26세 대집(大緝) 장사랑   부안현감 해수(海壽)의 2자,

 

27세 산두(山斗) 장사랑   부안현감의 장자,

 

28세 성신(省身) 첨사   진사 습(習)의 증손,

 

28세 성의(省義) 주부   진사 습(習)의 2자 대길(大吉)의 손자 첨지 일(鎰)의 자,

 

28세 충렬(忠烈) 신열(信烈)형제 효자

충렬(忠烈)공과 신렬(信烈)공 형제는 11살 9살의 어린나이에 부친이 졸하니 시묘의 정성이 어른에 미치고 노구인 충렬(忠烈)은 부친의 60주기 제사날 다시 시묘를 여막에서 시작하니 세인들이 크게 놀랐다 나라에서 정려를 받고 숙종대왕이 온양에 행차하였다가 이소식을 듣고 칭송하고 표창하였다

 

29세 백련(百鍊) 효자   충렬(忠烈)의 자,

 

29세 세정(世鼎) 효행   참봉 흡(翕)의 2자 대집(大緝)의 차자,

 

목천

23세 운(韻) 아산현감   청양현감 중아(仲雅)의 2자,

 

24세 수공(守恭) 참봉   아산현감 운(韻)의 장자,

 

25세 순(珣) 부사직   참봉 수공(守恭)의 자,

 

27세 협(鋏) 장례원판결사   부사직 순(珣)의 손자,

 

전의 진천

21세 숙지(叔지)면천군수.   송오공 승로(承露)의 2자로 태종조에 음사로 출사하여 면천군수를 역임하였다

 

22세 서통(瑞通)수군절도사

면천군수 숙지(叔지)의 차자로 무과시에 급제 오위부를 거처 안주, 영흥의 목사를 지내고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25세 강(崗) 어모장군 부사과 원종공신

참봉 언박(彦博)의 2자로 무과에 취제되어 오위부사용으로 출사하여 사맹사정을 거처 부사과에 오르고 명종조 11년(1555)에 왜선 60척이 전라도 영암에 침입하여 호조판서 이준경의 휘하에서 출전, 임난전에 전공을 새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어모장군이 되었다.

 

26세 공서(公恕) 무 선전관 2등공신   어모장군 강(崗)의 장자 정묘난에 순직(의주록)

 

27세 곽(곽) 진사   선전관 공서(公恕)의 장자

 

25세 헌(헌) 의사 충경공

참봉 언박(彦博)의 3자로 진사과에 등제하였으나 관직에 출사하지않고 선조 26년(1592)에 임난에서 관군이 도처에서 패배할때 공이 문중의 노비와 의병300여명을 모집하여 의병종사관으로 금산에서 왜적과 격전하다 708명의 의병과 전사하여 700의총에 묻히었다 충경공의 시호를 받고 경남 진양군 정촌면 예하리에 공의 충절를 영모하여 후손이 영사제(永思齊)와 순의비(殉義碑)를 건립 매년 청명일에 봉향하고 있다

 

27세 곤종(坤宗)선무랑   철준(哲濬)의 장자,

 

30세 경하(景河) 절충장군   철명(哲明)의 5세손,

 

22세 서형(瑞亨) 동복현감 통훈대부

면천군수 숙지(叔지)의 2자. 음직으로 내자시봉사로 출사하여 직장을 거처 동복현감을 지냈다

 

23세 낙(洛) 진사   동복현감 서형(瑞亨)의 2자,

 

24세 윤필(允弼) 참봉   진사 낙(洛)의 장자,

 

25세 기(琦) 성균관진사   참봉 윤필(允弼)의 장자,

 

25세 웅(熊) 문천군수

참봉 윤필(允弼)의 2자, 음사로 출사하여 하양현감과 문천현령을 거처 문천군수를 지냈다

 

26세 탁(鐸) 성균관진사   진사 기(琦)의 장자,

 

27세 서한(緖漢) 의병

성균관진사 기(琦)의 손자. 권율장군 휘하에서 임난참전 순절 (전의지)

 

30세 효인(效仁) 병절교위부사과   서한(緖漢)의 증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