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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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png 1 군사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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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영길(英吉) 대내마 태사

명주군왕 주원의 5세손으로 대내마를 지냈으며 귀향하여 선종의 기풍을 일으키는데 많은 역할을 했고 부석사 원융국사비명에 의하면 명주의 대부호만석군으로 그 재산으로 호국안민에 힘을 기우리고 고려태조 2년(919)에는 딸이 왕건태조비인 옥경대주로 입궁하게 됨으로서 태사로 봉작되었다.

 

6세 선강(善康) 이천김씨 시조

 

6세 선희(善希) 아찬 삼한벽상개국공신 삼중대광대보

태사 영길의 차자로 영주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비명에는 고려조 삼한벽상공신대광대보로 명성이 높았다고 하였다

 

6세 순식(順式) 명주장군

개국부의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開國府儀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이며 명주성통사로 후백제 신검(神劒)을 격파하는 삼국통일에 큰공을 세웠다

 

7세 예(乂) 태자대전 국구

대보 선희(善希)의 장자로 태조19년(936) 9월 왕순식과 함께 장병 2만명을 거느리고 관군과 합세하여 후백제 견훤의 아들 신검(神劍)을 격파하였다.그러므로 후백제를 평정한 공으로 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문하시중내사령 태자대전에 봉작되고 딸이 태조비 대명주부인으로 입궁하게 됨에 따라 국구(國舅)가 되고 사성하여 왕씨가 되었다.

 

8세 율(律) 이찬 공신 대장군

신라에서 아찬을 지냈는데 고려태조 18년(935) 10월 경순왕 9년에 고려에 입조함으로 공도 함께 고려조에 귀의하여 후3국 통일의 최후 격전장인 이천에서 대장(大將)장군으로 출전하여 신검(神劍)을 격멸하고 후삼국통일에 대공훈을 세워 대장군으로 개국공신에 올랐다

 

9세 몽(夢) 봉어 도감

대장군 율(律)의 장자로 광종 23년(972)에 상사국(尙舍局)봉어와 성종10년에 소부시소감과 소부시감 정4품이 되어 주전제조의 도감이 되었다.

 

10세 안(晏) 대장군

도감 몽(夢)의 2자로 통군사(統軍使) 최사위 휘하에서 정원장군(定遠將軍)으로 출전하여 글안군을 격파하고 현종 4년(1013)에 중무장군에 올랐으며 현종 9년에 대장군종3품에 승진하였다

 

11세 국모(國모)도병마사.사도사(정1품)

내사령 예(乂)의 현손이며 대장군 안(晏)의 장자로 선종 3년(1086)에 위위시(衛尉寺)의 경(卿)(정3품)이 되고 헌종 원년에는 이자의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권상서병부사(權尙書兵府事)가 되고, 같은해 7월에는 우복야 참지정사판병부사상주국(右僕射 參知政事判兵部事上國) 으로 승진하여 6부상서와 상위삼재부평장사가 의결하는 도당의 주제가 되었다. 시호는 경렬이며 숙종묘에 배향되었다.

 

12세 관(觀) 봉어 소경 경(종3품)

수사도(守司徒:정1품) 국모(國모)의 장자로 예종 3년(1108)에 사설서상사국봉어(司設署尙舍局奉御)와 예빈성(禮賓省)의 소경(少卿)에서 경(卿)에 올랐다

 

13세 지(贄) 감.판사(정3품)

경 관(觀)의 자인 국모(國모)의 손자로 인종조의 상사국(尙舍局)에 출사, 예종 4년(1150)에 대부시감(大府寺監)에서 좌간의(左諫議)에 올랐다

 

14세 여가(與可) 시어사 우간의(정4품)

판사 지(贄)의 장자로 명경과에 등제 어사대 감찰에 발탁된 이래 시어사와 승(丞)을 지내고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처 우간의(右諫議)에 올랐으며 신종 (1198)에 예부시랑 사서감, 어사대부를 지냈다

 

15세 보(輔) 직장(直長). 감(監)

우간의 여가(與可)의 장자로 상사국의 직장으로 출사하고 고종 14년(1227)에 전중성의 승(丞)을 거처 소감(少監)종4품에 올랐다

 

16세 광세(光世) 경.판사(정3품)

감(監) 보(輔)의 2자로 명경과에 급제하여 중서성 십유로 출사하여 고종 40년(1253)에 전중성내급사를 거처1270년 예빈성경(禮賓省卿)(종3품)에 오르고 원종14년(1273)에 사재시판사(司宰寺判事)정3품에 올랐다

 

17세 영흥(永興) 중서사인 직문하 우상시 경

판사 광세(光世)의 자로 충열왕 21년(1295)에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지내고 동 25년에는 중서문하성 직문하가 되었으며 33년에는 문하성 중서시 경이 되었다.

 

18세 우(우) 전객시판사(典客寺判事)

충숙왕 14년(1327)에 대상부사에 오르고 충혜왕 4년(1343)에 예빈시판사 정3품에 올랐으며 충정왕 2년(1350)에는 대복시판사에 올랐다

 

19세 탄지(坦之) 군사 조봉대부

판사 우(우)의 자로 공민왕 8년(1359)에 문하성중서사인이 되고, 2년뒤에는 정선군사로 재임중 홍건족의 침입을 받아 군사를 거느리고 격퇴하였다 슬하에 3자로 장자는 헌(軒)인데 무후하고 2자인 예(예)인데 옥계파조가 되고 3자인 지(지)로 평의공파 이다

 

20세 예(예)군사

군사 탄지(坦之)의 2자로 고려조에 고양군사를 지냈는데 이성계가 조선조를 창건하였기에 동생 지(지)의 회유로 왕씨에서 복성함

 

21세 존선(存善)   사직을 배명 받았으나 불수하였다 부는 예(예),

 

22세 이겸(爾兼) 진사 생원   세조 2년(1456)에 생원과 등제 금난반월회 창설자,

 

24세 희두(希斗) 첨정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하제하고 80상수로 첨정을 증직,

 

25세 약경(若鏡) 참봉   희두(希斗)의 자,

 

26세 인발(仁發) 무과 훈련원봉사   참봉 약경의 자,

 

26세 의발(議發) 사직   참봉 약경의 2자,

 

28세 장(璋) 통정   인발의 자,

 

29세 태억(泰億) 조산대부   사직 의발(義發)의 증손,